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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탄재 Jul 08. 2022

[초단편] 말로 이야기 EP 01. 착즙 주스

불편함이 불편한 사람들

김 과장은 사무실로 착즙 주스를 배달해 주는 아주머니에게 유독 친절했다. 하지만 말로는 이 모습이 불편했다.

김 과장은 주변 동료들에게 주스를 구독하라고 강요했다. 이미 김 과장 주변에 앉은 동료들은 김 과장의 은근한 압박으로 착즙 주스를 구독하고 있었다. 구독자 중에는 야채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말로의 자리는 그의 자리와 거리가 좀 있었지만, 사무실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 위험에 노출되어있었다. 말로는 남은 계약기간에도 김 과장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난초들을 교묘하게 쌓아 올려 은신처를 만들었다. 말로는 자신의 모습이 산호 뒤에 숨은 니모 같다고 생각했다.


김 과장은 착즙주스 구독을 유도하려고 때때로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주머니가 샘플로 나누어주는 작은 착즙 주스와 안내문이 들은 팩을 그의 것인 마냥 주변 사람들에게 굳이 빨대를 꽂아서 건네주면서 건강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주스 한 달에 얼마나 한다고 아끼고 그래? 너 맨날 사 가지고 올라오는 커피 몇 잔 안 먹고 이거 마시면 건강도 챙기고 아주머니도 도와드리고..."


주변의 동료들은 미리 빨대를 꽂아버려 거절할 수도 없는 샘플 주스를 마시며 울며 겨자 먹기로 구독 신청서를 작성했다. 말로는 김 과장의 무례한 배려도 불편했지만, 착즙 주스 구독을 자선행위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얼탱이가 없었다. 하지만 말로가 주스 구독을 피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빡빡하게 설계된 그의 지출 계획 때문이었다. 말로는 주스를 마시지 않고 디즈니 플러스를 구독하는 쪽의 사람이었다.  


김 과장의 무례한 자선행위는 경비아저씨와 청소 아주머니를 위해서도 계속되었다. 김 과장은 연말연시가 되면 빌딩 노동자들을 위한 선물을 산답시고 사무실을 돌며 돈을 걷었다. 그리곤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각종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 정성스럽게 포장하여 증정 이벤트를 열었다. 김 과장은 꼼꼼하게 모금액과 정산내역을 정리해서 선물 바구니를 전달하는 모습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후배들은 선물을 포장하거나 김 과장의 사진 위에 '따듯한 연말, 메리 크리스마스' 같은 문구를 넣었다.


"우리는 그래도 먹고살만하잖아."


얼마 전 퇴사자의 환송회 겸 회식자리에서 그는 크게 말하며 떠들었다. 김 과장은 항상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말로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쳤지만, 관심 밖에 머물고 싶어 평안한 표정을 유지하고 앉아있었다. 김 과장은 으레 술을 마시면 그날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신문 사설 내용을 읊으며 사회 문제에 대해서 떠벌리기를 좋아했다. 몇 가지 말로가 이해하지 못했던 주제들이 있었는데, 경향 신문을 구독하는 자신이 한겨레를 구독하지 않고 경향신문을 구독하는 이유를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설명했을 때는 듣고 있는 척하는 사람들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김 과장은 말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고기를 구우면서 집에 남은 반찬과 주말에 냉장고를 털어 만들 요리들을 생각했다. 멀리서 김 과장이 한국의 노동시장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말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고기 뒤집는 횟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불이 세고 난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김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말로는 재빠르게 눈을 피해 방금 뒤집은 고기를 다시 뒤집었다.


그래, 말로! 말로를 봐!


말로는 시선을 고기에 고정하고선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를 바라면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었다. 대꾸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내 그의 무례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말로~"


김 과장이 그간의 무관심을 사죄라도 하듯 부드럽게 말로를 부르며 말로의 앞자리에 앉았다. 손에 쥐고 온 소주잔을 탁탁 터는 순간.


혼자 좀 하시면 안돼요?


집게를 집어던지며 튀어나온 한마디에 말로 스스로 당황했다. 차가운 쇳소리는 순식간에 시간을 멈춘 듯 한 정적을 만들었지만, 술꾼들의 주정이 시작되자 시간은 자연스럽게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김 과장은 떨어진 집게를 주워 올리며 말로의 분위기를 살폈다.

말로는 딱딱해져 버린 삼겹살로 상추쌈을 만들며 착즙 주스 구독료가 얼마였는지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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