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관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신체 기관
시야를 넓혀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안과 전체로 넓혀볼까요?
믿기지 않겠지만 눈 검사만으로도 전신질환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눈은 인체에서 혈관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눈은 심장병이나 당뇨병과 같은 혈관질환을 예측하는 강력한 바이오마커(biomarker)가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의사들은 눈 특히 망막을 관찰해서 다른 질병을 예측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해왔습니다.
최초의 역사적 흔적은 1898년 스코틀랜드의 안과 전문의인 마커스 건(Marcus Gunn)이 직상검안경(direct ophthalmoscope)을 활용한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저촬영기술이 발달하기 이전 시대에 이미 돋보기로 망막 이상을 관찰하는 진단법이 발명된 것이죠.
마커스 건은 녹내장이나 시신경 병증과 같은 다양한 사례를 관찰함으로써 이를 통해 시신경에 출혈이 있는 환자가 당뇨를 앓아 신장에 이상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등의 망막 상태에서 신체의 질환을 유추해낸 최초의 연구 자료를 남깁니다.
Reitnal arterial narrowing may represent general arterial disease in kidneys and brain…
눈 망막 동맥의 협착은 콩팥과 뇌를 포함한 일반적인 동맥의 질환을 나타낼 수 있다…
- Marcus Gunn, Trans Ophthalmol Soc UK 1898; 18:356-391
1939년에는 KWB(Keith-Wagener-Barker) 분류법이 등장합니다. 이는 고혈압 망막병증의 정도를 네 단계로 구분하여 고혈압의 정도를 예측하는 일에 쓰이는데요. 고혈압은 전신 혈관의 압력을 상승시키고 특히 말초혈관에서 혈액 순환 장애를 일으켜 심장, 뇌, 신장, 눈 속에 있는 모세혈관에 각종 질병을 야기합니다. 이러한 혈류 장애가 심장에서 발생하면 심근경색, 뇌에서 발생하면 뇌경색이 되는 것이죠.
심근경색이나 뇌경색과 같은 심혈관계 질환은 적절히 예방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때문에 사전에 예후를 관측하여 대비하는 게 중요합니다. 고혈압의 사전 진단 및 처방에서 망막병증의 관찰이 중요해지는 건, 인체에서 별도의 관 삽입이나 주사제의 도움 없이 모세혈관의 상태를 측정하고 관찰할 수 있는 기관은 망막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에 이미 KWB 분류법이 등장한 것 역시 이러한 탓이 크겠죠.
망막의 상태를 통해 인체 내 타 기관의 질환을 밝히고자 하는 전통은 현대에까지 지속되어, 2005년 싱가포르의 웡 티엔(Wong Tien) 교수 연구진이 대규모 역학 연구를 통해 망막 혈관의 변화와 전신질환과의 통계적인 관계를 밝히는 데 성공했습니다. 망막 혈관(동맥과 정맥의 두께 비율, 기타 혈관)을 관찰하면 심장의 이상 여부를 알 수 있음을 밝힌 것이죠. 해당 연구는 의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지수가 높은 <The New England Jorunal Of Medicine>에 출판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안저 영상 판독을 통해 인체 내 질환의 징후를 관측하는 연구가 안과 영역 내의 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공지능의 시대와 만나 눈으로 전신질환을 보려는 노력은 실제적인 연구와 방법론들로 진화합니다. 당뇨 합병증과 심장질환을 인공지능이 진단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뇨병은 국내 30세 이상 성인 7명 중 1명이 앓고 있는 흔한 병이 되어 버렸습니다. 당뇨병이 무서운 것은 체내 혈당량이 수년간 지속적으로 상승하다 보면 혈관에 염증이 생기고 급기야 혈관이 막히면서 혈압과 동맥경화, 심장마비, 뇌졸중 등 각종 심혈관계 질환을 비롯한 전신에 합병증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혈당이 갑작스럽게 오르거나 내리면 위장장애와 무기력증, 의식 저하를 동반하며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고요.
당뇨 환자의 절반이 앓고 있는 당뇨병성 망막병증은 망막의 혈관 손상이 꾸준히 진행되다 실명에까지 이를 수 있는 치명적인 질환입니다. 망막은 신진대사가 특히 활발한 조직인 데다, 손상이 진행되면 회복이 힘들다는 점에서 더 치명적이지요. 이토록 치명적인 질환의 진단을 인공지능이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잘할 수 있습니다.
2016년 12월, 구글의 릴리 펭 연구팀은 인공지능을 활용해 당뇨병성 망막병증 진단을 시도했더니 미국의 전문 안과 의사들보다 높은 정확도를 보였다고 JAMA(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 발표했습니다.
릴리 펭은 미국 안과 의사 54명이 판독한 안저 영상 12만 8,000개를 학습 자료로 활용해 딥러닝으로 연구를 한 후 인공지능의 진단이 얼마나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 인도에서 수집된 안저 영상 1만 개를 통해 테스트했습니다. 그 결과 인공지능의 진단이 실제 안과 의사 8명의 평균값보다 높은 정확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안구 뒤쪽을 촬영한 안저 사진을 통해 진단되는 당뇨병성 망막증 분야에서도 인공지능이 의사의 진단을 대체할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릴리 펭의 연구는 한층 발전하여 2018년에는 안저 영상을 통해 심혈관질환의 위험 지표를 예측하는 모델을 만들기에 이릅니다. 시력검사 데이터를 분석하면 검진자의 나이, 혈압, 흡연 여부 같은 신체 데이터를 비교적 정확하게 추론할 수 있고 나아가 심장질환의 발생까지 예측하는 일 역시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는데요. 이를 계기로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예측하는 인공지능의 역할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안저 검사 결과를 보고 나이를 예측하는 것은 사실 안과 의사도 어느 정도는 가능한 일입니다. 젊은이의 망막 표면은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반면 나이 든 사람에서는 망막 뒤가 비쳐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별을 예측하는 건 모두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심장내과의 의사에게 심장 사진을 보여주면서 남자 심장인지 여자 심장인지 구별해보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요.
KWB 분류 도표 출처
인공지능을 활용해 당뇨병성 망막병증을 진단한 릴리 펭의 JAMA 논문
당뇨병성 망막병증을 진단하는 인공지능을 소개하는 릴리 펭의 텐서 플로 영상
Duke-NUS 안과 임형택 조교수
연세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싱가포르 국립 안센터, 싱가포르 안연구소, Duke-NUS에서 의과학자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세브란스병원 조교수 시절 망막 수술을 집도한 안과 전문의이며, 안과 영역에서 Big data & Machine learning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에디터: 최예지, 이명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