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야기 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칠 Dec 07. 2019

술잔이 비었다.

191207/20:00

잔을 채우는 여자의 동작이 크다. 여자는 밑동이 거의 드러난 소주병을 잡아들었다. 푸른 초록의 병이 소주 잔과 부딪히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소주가 잔 밖으로 넘쳐흐르기 직전 병을 바로 세웠다. 오른손이 병을 채 내려두기도 전에 왼손이 잔을 들어 올렸다. 맞은편 술이 채워지지 않은 빈 잔에 홀로 건배를 하고 여자는 고개를 숙여 입을 가져다 대었다. 흔들흔들 흘러내리는 소주를 쪽 소리와 함께 한 번에 꼴깍 삼켜버렸다. 술이 들어가는 길을 따라 여자의 머리도 한껏 뒤로 젖혀졌다. 여자가 삼킨 소주는 식도를 지나 위로 내려간다. 목 아래로 뜨겁게 퍼져가는 느낌에 여자는 저 멀리 목적 없는 시선을 던진다.

중학생 시절 여자는 친구를 사귀는 게 힘들었다. 짝꿍이 지우개를 빌려달라는 말에 여자는 필통에서 새 지우개를 꺼내 건넸다. 여자의 가방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지우개나 펜들이 한 움큼씩 들어있었다. 짝꿍은 당연하다는 듯 지우개를 받아 쓰곤 본인 책상 밑 서랍장으로 아무렇게나 집어넣었다. 여자는 지우개를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홀로 하교를 하던 여자는 큰길을 놔두고 골목길을 택했다. 큰길에는 친구들과 하교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학생들로 북적거리는 큰길을 혼자 걸어가는 것은 짝꿍에게 매일같이 필기구를 빼앗기는 것보다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조용히 골목길을 걷던 여자 앞으로 고등학생 무리가 다가왔다. 이번 골목길만 꺾으면 집이었다. 고등학생 무리 옆에는 여자와 같은 반 학생 하나도 함께 서있었다. 그 여자애는 일명 노는 학생이었다. 다른 노는 학생들처럼 몸매가 드러나도록 교복을 줄이거나 진한 화장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일, 가령 담배 같은 것들을 즐겨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남고에 다니는 남학생과 사귄다거나 10만 원에 몸을 팔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여자애를 피했다. 같은 교실을 써도 마주하지 않았으며,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뒤에서만 수군거렸다. 여자는 그 여자애와 딱 한 번 말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애는 학교 쓰레기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자애를 발견한 여자는 조용히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내려놓았다. 작은 인기척도 내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 여자애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초조해졌다. 왠지 엄마한테 혼날 때처럼 내가 모두 잘못했다는 표정을 지어야만 할 것 같았다. 긴장감에 발끝만 쳐다보며 윗입술만 곱씹었다.

너도 하나 필래?

여자는 저 여자애가 자신에게 물어본 건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여자애를 쳐다보았다. 여자애는 분명 여자를 보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가봐.

알아듣기 힘든 작은 목소리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여자는 땅에 시선을 고정하며 쓰레기장을 서둘러 나왔다. 움켜쥐고 있던 주먹에는 땀이 배어 나와 축축했다. 손바닥을 펴니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후로 여자는 더욱 그 여자애를 피했다. 남들보다도 더 그 여자애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혹여나 또다시 둘이서만 마주칠까 봐 쓰레기장에 가는 일도 조심히 행했다. 여자의 노력 덕분인지 더 이상 그 여자애와 얽히는 일은 없었다.

그 여자애는 여자의 시선을 느끼자,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교복을 입고 있지만 성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말했다.

야, 가지고 있는 돈 다 꺼내봐.

여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여자에게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는 여자가 돈을 가지고 있는 게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을 했고 그래서 여자는 불안했다. 여자는 차라리 남자에게 줄 돈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저는 가지고 있는 돈이 없는데요.

너 뒤져서 10원이라도 나오면 뒤진다.

말을 마친 남자는 여자를 잡아끌어 가방을 벗기고 뒤지기 시작했다. 책이나 필통 따위를 잡히는 대로 바닥에 집어던졌다. 포장지가 벗겨지지 않은 새 필기구들도 후드득 떨어졌다. 남자 옆에 서 있던 몇몇 고등학생들이 새 필기구를 집어 주머니에 챙겼다. 여자는 탈탈 털리는 자신의 가방을 보며 혹여나 본인도 모르게 들어가 있던 돈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가방에서는 10원도 나오지 않았다. 여자는 안도했다. 그러나 곧 남자는 또다시 여자를 잡아끌었다. 외투를 벗기고 교복 치마 주머니를 뒤졌다. 그 남자의 일행들은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반 여자애는 인상을 쓴 채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너무 창피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남자는 여자의 허리와 허벅지를 더듬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굳어있는 여자를 밀쳤다.

에이씨, 하나도 없어. 저리 비켜, 병신아. 내 눈에 한 번만 더 띄면 죽는다.

내가 없을 거라고 했잖아.

작은 목소리였다. 줄 곧 바닥만 보던 여자애가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 여자애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너 뭐라고 했냐? 내가 하는 일에 토 달지 말라고 했냐, 안했냐?

남자는 여자에게 등을 돌려 그 여자애에게 다가갔다. 성큼성큼. 여자는 위기가 사라졌음을 느꼈다. 남자는 그 여자애에게로 가 한 팔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의 무리에게 말했다.

야, 노래방이나 가자. 오늘은 그냥 내가 쏜다.

그의 무리는 왁자지껄하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여자는 살짝 고개를 들어 여자애를 살폈다. 여자애는 여전히 남자에게 어깨를 감긴 채 뒤뚱 거리며 무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여자는 여자애의 뒷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여자애가 골목길을 지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여자는 지저분한 골목길에 아무렇게나 박혀있는 자신의 물건들을 내려다보며 툭, 툭, 눈물만 튕겨냈다.

너는 술도 혼자 마시고 싶니?

여자의 목적 없는 시선을 거둬낸 건 작은 목소리였다. 여자의 시선은 여자와 비슷한 표정을 한 다른 여자에게로 향했다. 뾰족한 말과는 다르게 여자의 빈 잔에 술을 채우는 다른 여자의 행동은 부드럽다. 여자는 맞은편 계속해서 비어있던 잔에도 넘치지 않게 가득 채워진 소주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여자는 찰랑 거리는 잔을 들어 다른 여자를 향해 들어 올렸다. 다른 여자는 오자마자 시작이라며 투덜댔지만 높이 들어 올려진 여자의 잔에 건배를 외쳐주었다. 크게 건배!

매거진의 이전글 한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