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이럭 클럽]을 보다.
디즈니플러스를 뒤적이다 영화 조이럭 클럽을 발견했다.
세상에!!! 몇 년 만이야!!! 화들짝.
작가 에이미 탄, 조이럭클럽. 이 소설의 시작은 영화였다. 오래된 이야기를 안고서 중국에서 건너온 엄마와 미국에서 태어난 딸들의 이야기. 오래된 동양적 서사 모형들이 모여 앉은 영화, 결국은 엄마와 딸 사이의 이야기, 그리고 여자들의 이야기.
오래전 희망을 품고 미국에 도착한 여자의 손에 남은 백조의 깃털, 모든 이야기와 은유, 그리고 희망을 담아 백조가 깃털만 남았지만 괜찮다고 시작하는 영화. 중국식 이야기의 원형, 전설 같은 네 엄마의 인생과 엄마의 중국 이야기를 다 알 수 없는 현대적 딸들의 이야기가 교차했다. 졸렸지만 영화 제목을 보자마자 봐야 할까? 볼까? 생각을 한참 하다 자세를 고쳐 앉고 플레이를 눌렀다. 주말이고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좀 늦어지면 어때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보다가 잠들면 또 뭐 어때하는 그런 마음으로.
맨 처음 이 영화를 언제 봤더라. 아마도 엄마가 떠난 후였겠지. 내 상실을 투영할 무엇이든 필요했을 그때 조이럭 클럽을 만났다.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모른다. 아 나는 절대 저 나이의 엄마를 만날 수 없구나, 우리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구나 하는 뼈가 시린 사실과 부러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고작 중학생인 여자애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들. 그리고 원작 소설을 사서 몇 번이고 읽었다. 대학생이 되고 사서 모은 원서 중에 조이럭 클럽도 있다. 뭐, 그냥 기념품이지만.
오늘 독서모임에서 엄마 얘기를 쓰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돌아왔는데 하필 조이럭 클럽이라니. 처음 엄마 얘기를 쓰기로 결심하기까지 몇 년, 첫 번째 글을 쓰고 다음 글을 쓰기까지 또 일 년쯤 걸렸다고. 그러다 어느 순간 후루룩 쓰고 있더라고. 쓰면서 사이사이 좀 울기도 했다고. 그러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이제는 쓸 만큼 썼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얼마 만에 보는 걸까. 삽 십 년을 훌쩍 지나온 영화는 어제처럼 흐르고 이야기는 다 아는데도 새롭다. 내가 영화 속 딸들의 나이에 근접하고 보니 이 이야기는 좀 더 입체감 있게 다가온다. 오래된 텍스트들이 나의 변화와 맞물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언제나 새로운 기쁨이기도 하다. 흔하다면 흔할 수 있는 이야기 엄마와 딸의 갈등, 어느 순간엔가 닿아있는 마음, 딸들을 향해 보내는 오랜 독백과 사랑 그런 이야기들. 내가 동양인이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이야기들이 거기 있다. 그리고 모든 갈등의 해결은 진심이라는 지극히 동양적인 결론까지도. 사실 오늘은 새삼 몇 군데서 눈이 벌겋게 코가 매워지다 마지막에는 펑펑 울었다. 아이고 영화가 사람을 울리고 결국 날밤을 새고 얼마 뒤면 동이 트겠다.
엄마.
나는 엄마에 대해서 너무 아는 게 없구나, 내가 기억하는 추억에 기대 엄마를 기록하다 보니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주르륵 나열되고, 마음을 더듬듯 엄마는 그랬을까 하는 안으로 잦아드는 물음이 한계처럼 조금 지치기도 했다. 그래서 어쩐지 쓰는 일이 좀 지치기도 했고 그러다 오래된 애도를 내 방식대로 하다 보니 이제는 좀 덤덤하기도 하다. 파르라니 감정이 돋아 어쩐지 돌아눕기도 힘들던 시간이 무던히 지났다. 나는 엄마가 떠난 시간에서 이만큼이나 멀리 왔다.
너무나 뻔한 클리셰 같지만, 나는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라고 말하는 주인공을 향해 엄마들은 딸인 네가 모른다고 하면 안 된다고 너는 네 엄마의 모든 걸 다 안다고 모를 수가 없다고 하는데 그 안다는 말이 꼭 지금의 나에게 닿는 말 같았다. 나는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고 한숨을 푹 내쉬며 미안해하던 마음이 화들짝 놀라서 자세를 고쳐 앉는 느낌. 그래, 물을 수 없는 사람을 향해 피어나는 궁금증이 사랑이 아니면 뭘까.
내 몸에 기록된 것들은 다 엄마에게서 왔는데 나는 엄마의 다음을 살고 있는데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사라지고 어린 기억에 기댄 추억도 무뎌졌지만 은유는 살아남아 내가 되었다.
내가 당신의 꿈인 날들이 있었겠지, 우리 엄마의 희망을 의심하지 말아야지.
그래 사랑이 이렇게 남았는데.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