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해당 분야의 오랜 기술자였다.
그 업종의 곁다리 파트로 창업을 결심하고 새로이 판을 짠 게 IMF였다. 진짜 돈 없는 설움 삼키고 개고생을 하고 버텨 키워온 회사다. 그때는 아버지가 젊었다. 아버지의 중년이 고스란히 갈려 들어갔다.
전쟁 중에 태어난 아이, 집안의 유일한 아들
밀가루 푸대를 잘라 공책을 묶어주면 산수 문제를 그렇게 신나게 풀었다는 아이. 하루 한 권이 모자란 그 노트를 할아버지는 매번 새로 묶어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삼 남매를 데리고 쌀장사를 하며 생활을 꾸리셨다 한다. 쌀팔아 기차 타고 돌아오면 배 고파 기다리는 애들, 드라마 육 남매 얘기가 남 일이 아니더라 하는 그 얘기. 어지간해선 다 같이 먹고살기가 힘들던 시절, 너무 일찍 철이든 큰고모와 눈물이 너무 많은 아빠와 세상모르는 막내고모가 한 동네 살던 큰 집에서 눈칫밥 먹고 컸다 하는 그 얘기.
아버지는 학교를 미처 다 마치지 못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 공장에 취직했고 아버지 평생 업이 되었다. 일의 성취는 곧 나 자신과 하나였고 무용담처럼 들려주던 일제 기계를 다 분해해 재조립해내는 유일한 기술자였다던 아버지. 그냥 암산으로도 엑셀표를 돌려버리는 산수머리는 날개를 달았다.
‘우리 아버지가 쪼매만 더 길게 살아서 내가 공부만 쪼매 더 했으면 내가 이라고 안살았을끼다.'
할아버지 기일이면 가끔 하던 그 얘기.
내가 이 제사를 올해로 육십 년째 지낸다 하던 어느 해의 그 얼굴.
나는 스무 살이 넘었다. 내가 모르던 시절의 아빠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한창 사춘기를 버티던 그때의 야속함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아버지를 계속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손바닥을 뒤집듯 감정이 녹지도 않았다. 집을 오가는 시외버스에서 가끔 혹은 종종 울었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참 기이한 것이었다. 꽤 긴 시간의 문제였다. 어느 순간엔가 사십 대의 젊은 아빠가 눈에 들어왔다. 평생 고생시키고 속만 썩였는데 부인이 덜컥 죽고 아직 어린 자식들만 남았다. 미안함과 생활은 또 별개의 문제였을 테다.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줏어먹고 내 안에는 이도저도 아닌 감정들이 자라났다. 나는 자식이고 당신은 내 부모인데 내가 너무 섣부르게 이해를 시도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마음을 닫고 그냥 자식으로 살았어야 했다. 그를 인간으로 이해하지 않았어야 한다. 엄마가 죽고 없는 자리에 남은 아버지가 그래도 내 보호자였다. 그 싫음을 유지하기에는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컸다. 너무 오래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어쩌면이라고 감정을 숨겨보지만 결국, 나도 사랑받고 싶었다.
그렇다고 '회사로 들어와 주면 어떻겠노' 하는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뒤죽박죽인 채로 치기 어린 오만과 다를 바 없는 내가 아니면 누가 아버지를 돕겠는가 하는 마음이 있었다. 후회할 걸 알았다. 조건과 환경도 쉽지 않았다. 안다고 감당할 수 있다고 단언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이제 와서 뭐라고 하겠는가. 정말이지 내팔내꼰. 애증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