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 같은 논픽션 에세이 _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미국
절대적 우방이란 없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정을 보자. 사랑이란 전제로 두 사람이 만나서 한 공간안에 생활하기로 합의하는것이 결혼이다. 그런데 항상 합의가 잘되고 관계까 돈독한가? 아니다. 언쟁도 생기고 급기야 헤어지자는 말도 나온다. 하물며 국가간은 어떨까? 언쟁은 분쟁이고 전쟁이며 헤어지는것은 적이 되는 것이다. 미국의 이혼을 보면 미국식 사고방식이 정말 잘 나타나 있는것 같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서로 합의하면 이혼이 가능하다. 이때부터 사랑은 없고 말 그대로 개싸움이 시작된다. 물론, 대리인인 변호사들이 만나 합의점을 찾지만 감정싸움은 치졸함의 극치를 이루게 된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면 나의 미국인 친구의 경우 일종의 로비스트 일을 하는 관계로 멋진 집을 지으면서 뒷 마당엔 파티를 위한 거대한 데크를 만들었고 천병 정도를 저장할 수 있는 와인창고도 만들었다. 두 사람이 이혼하기로 한 후 변호사 입회하에 재산 분할에 대한 논의를 위해 좋은 시절 서로 의논하며 만들고 꾸며왔던 집에서 만났다. 우연히 동석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것 같았다. 커텐, 쿠션 부터 식기류 까지 서로 본인의 것임을 주장하였다. 고가의 와인을 가지고는 “이 와인 살때 내가 더 많은 돈을 벌었으니 네 몫은 코르크나 라벨 정도겠네, 그래 봐준다 한잔 정도는 네거야!” 한편의 막장 드라마 같지만 현실이다.
대한민국도 국방과 관련된 사항에 있어서 지나친 미국 의존도는 지양할 필요가 있다.
주한미군의 미국적 입장은 국방비를 지출 하더라도 자국 군대가 국익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장기적 안목에서 비롯된 미국적 사고방식이다.
정보세계에서 기억할만한 사건이 없었다는것은 그 사실만으로 치명적인 사건이 될 수 있다. 인원 축소나 예산 삭감과 더불어 행동 범위까지도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WTC(World Trade center) 의 테러 발생 순간 부터 주범들을 잡기 위한 2년여간의 추적과 부시 전 대통령의 암살시도까지 1993년은 다사다난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건설도 주요한 이슈였다. 수년 전 부터 정찰 위성을 통한 정보 수집으로 핵시설일 것이라는 유추일뿐 정확한 증거에 관한 첩보를 접할길이 없었다. 어느날 미국 정보관련 부서들이 아닌 이스라엘 모사드로 부터 CIA에 전달된 여러건의 기밀 문서들 중에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낯익은 한국식 이름 "Yun" CIA 자료에 따르면 국제원자력기구 북한 대표이며 북한 노동당 군수담당 전OO의 사위였다. 1993년에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담당했었던 조사관들은 미국 첩보위성의 영변핵시설과 관련된 위성사진을 북한 핵개발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했지만 당시 북한대표였던 은 이"Yun"은 완강하게 부인했다.
이스라엘과 북한간의 거리도 거리지만 상간 관계가 없을것 같던 두 나라의 이해 관계는 1970년대 부터 시작되었다. 김일성이 집권하던 시절 이스라엘과 적국 관계에 있었던 시리아와 이란 그리고 파키스탄을 통해 북한은 무기나 테러와 관련된 훈련을 목적으로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중동지역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던 북한이라는 존재를 간과할 수는 없었고 급기야 북한을 방문하여 협상을 시작하였다. 유대인 특유의 협상 능력을 발휘해서 중동에서 간접적으로라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하지 말라는 의사 전달과 함께 당시 북한이 원하는 부분을 들어주는 방식이었다. 역시 모사드였다. CIA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아래에 있어 각종 청문회에 불려가 자신들의 당위성을 주장 할 수 밖에 없어 활동 내역이 어느 정도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반면 모사드는 그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언젠가 북한에서 열차 폭발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열차에 탑승하고 있었던 시리아의 핵 물리학자들과 북한 핵 관계자들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배후가 모사드였을 가능성이 99.9%이다.
결국 미국은 자신들이 보유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북한을 조정하려 하였던 결과가 1994년 3월 ‘영변사태’ 이다. 모사드의 정보를 100퍼센트 이상 신뢰하고 있었던 미국 입장에서 더 따질 이유가 없었다.
당시, 모의 작전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각 지역에 핵폭탄을 투하하면 지리학적으로 ‘한반도’ 가 아닌 일본과 같은 ‘섬나라’ 가 될 수 있고 중국이나 소련과의 이해관계도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언급한 내용을 보면 “양측의 피해에 대한 보고서를 보고 공격명령을 철회 하였다" 라고 하였고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통화 시 “대한민국 군 통수권자로서 내 민족을 향해 총을 쏠수는 없다" 로 대응하였다고 양측 모두 미담처럼 이야기 하였지만 실제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던 우리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공격하는것이 옳다는 기계적 결론을 접하면서 내 입장에서도 대륙에서 분리 시키는 방안도 좋을것 같은 생각도 들었던것이 사실이다.
이유는 당시 소련은 자국을 제외한 그 어느 나라의 분쟁에도 참여할 여력이 없었고 중국 또한 미국의 북한 핵 공격에 대해 UN과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반발 외 직접적인 전쟁 개입은 할 처지가 안되었다.
"美 1994년 북핵때 전쟁 검토…승리확신에도 참사우려로 접어"
어떤 이유에서든 클린턴 대통령은 ‘Black Box’의 암호와 열쇠를 사용하지 않았다. 요즘 들리는 자국민의 소개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소요되는 관계 등으로 당시 상황들을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걸프전을 통해 미국은 자신들이 개발한 첨단 무기들의 실전 효능을 입증한 후라 자신감에 넘쳐 있던 때였다. 설사 미국의 핵 공격 후 북한이 전면전을 시작하더라도 걸프전과 같이 단 시간내에 점령을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백악관 회의에서 핵 공격에 대한 1차 작전 승인이 난 후 나는 미 8군을 비롯한 주한 미군 소속 비전투요원들과 UN소속 국가의 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관계자들의 소개 계획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걸프전을 위한 사전 준비 상황에 대한 혁혁한 능력을 인정한다는 그들 나름의 논리와 설득으로 나는 13년만에 꿈에 그리던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향해 워싱턴 디씨 볼링(Bolling) 공군기지에서 C-130 군용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