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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원 Jun 09. 2024

공중 목욕탕 가는 날

1980년대 부산으로 떠나다

한국사적으로는 암울했던 70~80년대를 사는 동안

나는 80년대 중후반에서야 비로소 우리나라 현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노는 하루가 행복한 소년이었다.

세상을 알아가는 것은 진실과 사실을 구분하는 것이고

해야 하는 일을 외면하면 안 됨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나를 찾아 떠나온 추억 여행길에서...

나의 부모님을 이해하는 시간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여정이 되었다.



등굣길을 따라 걷다 보니, 천수탕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천수탕은 당시 내가 살던 전포 4동의 가장 큰 목욕탕이었고,

벌거벗고 학교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는 목욕을 집에서 할 수 없고,

아이들은 매주 목욕을 하는 경우가 없어

기본은 한 달에 한 번이고, 자주 하면 2~3주에 한 번씩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공장 일에 하얀 가루를 덮어써야 했기에,

일을 마친 후 매일 공장 목욕탕에서 씻고 퇴근하셨다.

공장에서 싸워를 하지 않으면 퇴근이 어려웠다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와 목욕탕을 함께 간 기억은 중학교 때로

아버지께서 퇴직을 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는 어머니와, 친구들과 목욕탕을 다녔다.


재개발로 간판이 사라진 천수탕 입구


천수탕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여탕에 갔다.

가끔은 같은 반 여자 아이를 만났던 기억이 있지만,

당시에는 그냥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빨간색 때밀이 타월이 정말 싫었다.

이태리 타올로 어머니가 내 몸을 박박 때를 밀면,

나는 내 살 껍질이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난 그래서 목욕탕 가는 날이 정말 싫었고

간혹 도망을 치기도 했다.

그 덕(?)에 나는 한두 달에 한 번씩 목욕탕을 가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동네 형들과 목욕탕을 다녔다.

그때는 매주 가려고 했다.

목욕탕이 우리 동네 수영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목욕탕에 나타나면 

천수탕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우리를 감시하기 시작하셨다.

우리가 이 탕 저 탕을 건너 다니거나,

뛰어다니면 큰 소리로 야단을 치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이들이 뛰어다니다가 

미끄러져 넘어진 사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천수탕을 갈 때는

때밀이 아저씨가 안 계시는 시간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없는 시간을

선택해서 갔다.

그 시간은 토요일 오후 4시이다.

간혹 때밀이 아저씨가 불쑥 목욕탕에 오는 날이면

우리는 정말 얌전히 목욕만 하고 나오곤 했다.

때밀이 아저씨가 계실 때 놀다가 

우리는 단체로 목욕탕에서 벌거벗고 

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우리는 

세상 모든 곳이 놀이터였고

세상 모든 것이 장난감이었다.

친구와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어머니가 아닌 

동네 형과 친구들과 천수탕을 가던 날

나는 목욕탕 가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어머니는 목욕탕을 갔다 나를 가끔 부엌에서

옷을 벗긴 후 때를 밀어주시곤 했다.

목욕탕에서 다 씻지 못한 때를 집에서...

나의 등짝을 때리면서...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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