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아픈게 싫어서 방어력에 올인)
팬데믹의 서막 가족여행을 떠나다.
2020년 3월, 이때가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마치 하나 된 듯 반대의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밑도끝도 없는 자신감과 소정의 페널티가 싫었기에 강행했다. 이미 많은 국가들이 국경을 폐쇄하거나 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려오던 시점이라 출발하는 날까지도 입국 금지 여부에 촉각을 세워둘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면 괜찮아!라는 파이팅만으로 그렇게 하고 가족여행을 강행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얼마 전 확진자의 숫자가 일일 30만을 넘어가던 날이었다. 존버를 다짐했던 우리 가족에게도 균열이 생겼다. 인후통이 생겼고, 양성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3월의 추위 속에 비가 내리던 날 첫째 아이는 자가격리를 시작하였다.
자가격리, 너와 나 사이의 거리.
오늘도 아이는 아프다.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확진 이후 경험담이지만. 나는 준비도 안됐고, 당혹스러움에도 힘들어하는 아이를 말로밖에 위로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이와 우리는 거리를 두어야 했다. 집이란 의미 속에는 나를 보호해주는 안정감도 포함된다. 하지만, 격리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보호가 아닌 감시와 가두는 공간으로 돌변한다.
그렇게 아이는 방에 갇혔다.
밤이 찾아오면 아픈 이들에 게 때로는 두려움이 시작되는 시간이 된다. 몸살감기를 경험해본 이들이라면 잘 안다. 낮에는 괜찮않던 몸도 밤이 되면 열이 솟구치는 경험을 말이다.
그로 인해 나의 걱정은 늦은 저녁 아니 새벽까지 아이의 방에 귀를 기울이게끔 했다. 방문 너머까지 힘겨워하는 아이의 아픔이 느껴졌다. 새어 나오는 아이의 울음소리에는 쇳소리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눈으로 확인한 아이의 모습은 힘든 내색을 할 기운조차 없는 듯 보였다. 격리된 공간 밖의 사람들은 그 안을 들여다볼 용기를 쉽게 내지 못한다. 공포의 다른 의미는 이런 것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기에 더더욱 그 안을 열어보려 하지 않는다. 차단하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밥을 먹는 것도 쉽지 않은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안아주지도 못한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집안 곳곳을 활보하던 아이는 자신의 범위가 방안뿐임을 알기에 마음까지 지쳐있는 듯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자가격리 가이드
오미크론에 감염된 확진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고통이 있다. 찢어지는 듯한 목의 통증이 그것이다. 인간은 자기 방어체계 구조상 몸의 어딘가에 염증이 생기고, 붓기 시작하면 고열을 뿜어낸다. 하지만 오미크론은 37도 내외의 열을 동반한 체 3일 밤낮으로 집요하게 인간을 괴롭힌다. 준비가 안된 의료진의 처방약은 목의 통증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한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유튜버들이 쏟아내는 무지성 콘텐츠들이 매일매일 업데이트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자가격리를 하는 가족들에게 어떠한 지침이나 가이드도 없다. 아이는 3일 넘게 씻지를 못했다. 샤워할 기운이 있을까 싶었다. 괜찮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내심 욕실은 이용한 뒤 그 안에 바이러스가 생존할 확률을 계산하고 시간을 따져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이가 욕실을 이용하는 규칙을 정하려다 보니 마치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과 같았다. 이럴 땐 무식한 게 최선이라는 생각에 보이는 모든 공간을 항균코팅하고 수시로 닦아냈다. 집에서도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아이가 지나간 공간 안에 바이러스가 얼마나 생존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무식해질 수밖에.
무인도에서 생존하는 방법
우리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감염될 확률은 몇%라고 숫자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제법 높다는 정도는 체감상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안에서 생존하는 방법은 알려진 게 많지 않다. 심지어 우리는 무인도에서 고립될 상황이 매우 극미함(거의 없다)에도 불구하고 무인도에서 생존하는 방법과 가이드는 차고 넘친다.
팬데믹이 앤데믹이 된다한들 어차피 생존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진정한 위드코로나 시대라 생각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격리된 이들과 계속 함께해야 하고, 격리에서 해방되더라도 쉽게 거리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생존은 가능한 것인가? 이제 누군가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가 생존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자기 방어력을 높이는 데 있다는 것을. 방어력에 올인할 시대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