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러쉬의 표정
작년 연말엔 현주와 콘서트를 보러 갔다.
크러쉬의 <CRUSH HOUR : O>
미리 말하자면, 콘서트 찾아갈 만큼 크러쉬를 좋아하진 않았다.
내 플레이리스트엔 그의 곡도 꽤 들어있지만... 아무래도 돈을 지불할 정도는 아니다. 현주의 제안으로 엉겁결에 따라갔을 뿐.
그러나 결과적으로, 난 크러쉬의 팬이 되었다.
콘서트에서 '그가 보여준(혹은 내가 엿본) 표정' 때문이다.
약간 민망해하는 듯하면서도 웃을락 말락 아니 울려는 것처럼도 보이는, 떨림 서린 얼굴.
사실 콘서트 초반부터 그의 표정이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다.
무대 주인공인데 얼굴이 퍽 굳어있었다. 엄청 긴장한 신인마냥. 분명 데뷔한 지 10년도 넘은 베테랑 가수인데.
뿐만 아니라 그는 멘트할 때마다 이따금 더듬었으며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도 더러 짓고 심지어 '입 꽉 깨문 애매한 표정'으로 춤췄다! (물론 잘 춘다.)
처음엔 웃기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미디어로 본 그는 '멍 때리기 대회' 우승자이자, 허당 이미지를 활용하는, 농담 잘하고 유머러스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무대 위 어설픈 모습도 청중을 즐겁게 하려는 '계산된 연출'인가 싶었다. 근데 한 시간이 지나는데도 그 표정, 풀릴 기미가 안보이더라. 뭐지? 이렇게 뚝딱거리다 끝나는 건가? 라고 생각하던 차에 비로소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공연 중간 영상엔 2024년의 크러쉬가 찍혀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2024년의 '신효섭 씨'가 겪은 일들이.
허리디스크 수술을 했고, 두 달은 누워만 있었고, 몸을 못 가누니 일도 못해서 우울해졌다고. 재활하는 내내 퍽 불안했지만 그래도 극복하려 글을 쓰고 미래의 콘서트를 떠올려왔다고. 자기를 둘러싼 환경, 기다리는 팬들을 상상해 가며.
그렇게 정한 공연 콘셉트가 [O]. 동그라미, 원. 모두가 연결되고 순환하는. 어쩐지 무대 곳곳에 O가 있었다.
막말로 크러쉬만큼 유명한 가수가 뭐 그리 걱정할 게 있을라고... 싶지만 그날 듣게 된 사정과 재활 과정을 찍은 영상과 담담한 자기 고백에 기분이 묘했다. 긴장 서린 표정도 이해가 되고, [O]이라는 콘셉트도 잘 보였다.
뭐랄까, 난 그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인기 뮤지션으로만 봤던 그에게서 조금은 자신감 떨어진 서른의 청년이 보였달까. 그래서 속으로 팬이 된 것이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그 표정을 떠올리곤 한다.
예상치 못하게 마음 흔들린, 신기한 경험이었다.
종종 피디 지망생 분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연락을 받는다. 자소서를 어떤 식으로 쓰는 게 좋은지, 기획안을 쓸 때 뭐에 중점을 두는지, 아이디어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 같은...
'잘... 모르겠네요. 답이란 게 있을까요?'
이게 솔직한 마음이지만, 자칫 무례해 보일 수 있으니 잠깐 멈추고 다시 들여다본다. 사실 지망생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뭘]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걸까? 지금도 날 괴롭히는, 해결도 안 되는데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 질문.
모든 상황에 통할 스토리텔링 전략이 있나? 역시 어렵다.
대신 내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이라도 말해본다면, 난 크러쉬의 표정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지만,
'매력적인 콘텐츠'엔 그만이 가진 '내밀함'이 있다고 느낀다.
내밀함이란 무엇인가.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모습.
쑥스럽거나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보통 나만 알곤 하는 면들. 이를테면 크러쉬가 말한 두 달의 재활 과정과 그가 느낀 불안함 같은. 인간은 대개 그런 면을 약점이라 생각하기에 숨기고 싶어한다. 내보이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 난 그런 내밀함을 보면 마음이 간다.
오디션 프로그램, 연애 관찰 프로그램, 유퀴즈 같은 인터뷰에서 생기는 팬덤과 흔히 말하는 공감이니 진정성이니 하는 단어도 같은 원리가 아닐까? 본인의 내밀함을 담보로 만들어지는 공간에, 타인이 들어와 이것저것(이를테면 사랑이나 관심, 혹은 질투...) 같은 걸로 채워 넣는 것이다.
이 이론(?)이 맞다면, 스토리텔링을 해야 하는 창작자는 '내밀함'을 적극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주인공의/출연자의 내밀함을 '드러낼 것'인지 - 드러낸다면 '얼마나' '어떻게' 비치게 할 것인지에 따라 콘텐츠의 매력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은, 비록 콕 집어서 설명하진 못하더라도, 차이를 반드시 알아챈다.
여기까지가 제 생각입니다.
답이... 될 수도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