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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목수 Mar 09. 2020

인도네시아 역사,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역사, 근. 현대사 (1)

 

 인도네시아 Report의 첫 번째 글에서 인도네시아의 정치가 안정된 점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고 했다. 자카르타 골목길에서 어린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처럼 정치가 불안정한 나라의 상황과 확연히 비교된다. 최근에 미국과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솟은 이란은 산유국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국민들이 힘겨운 삶을 희망도 없이 이어나가고 있다.


 안정된 민주주의 체제란 것은 이미 누리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가 힘들다.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 체제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도 피를 흘려 민주화를 쟁취하지 않았던가? 인도네시아는 17,000개가 넘는 섬들이 3개의 시간대에 걸쳐서 퍼져 있다. 이 넓은 나라에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700개 이상의 다른 언어를 쓰며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복잡 다단한 나라에 민주주의가 안착된 것은 그야말로 신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인도네시아도 민주화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부터 군부 독재자 수하르토까지 인도네시아에는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독재가 지속됐었다.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인도네시아의 독립투사이자, 친일파였으며, 공산주의자였고,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체제를 안착시킨 강력한 독재자였다.  1900년 초반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는 무려 350년이 넘게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수카르노는 학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네덜란드의 식민 정부에 체포되고 약 10년 간의 유형 생활을 했다.


향료 전쟁, 가일스 밀턴, 손원재 옮김, 생각의 나무 / 향료 전쟁은 유럽인들 시각에서는 용기와 모험에 대한 이야기지만, 인도네시아 입장에서는 착취와 피정복에 대한 역사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는 무려 350년이 넘게 지속되었는데, 일본은 마치 그 기나긴 식민 지배의 사슬을 끊어주는 모양새로 교전을 통해 네덜란드 군을 몰아내면서 인도네시아에 진입했다. 그 당시 인도네시아 입장에서 일본은 식민 약탈자 네덜란드를 물리쳐준 고마운 존재처럼 보였다.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시기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드는 1941년이었다. 그때부터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약 3.5년 동안 일본은 네덜란드가 350년 동안 수탈해 간 것보다 더 많이 수탈해갔다고 말할 정도로 지독했다고 한다. 일본이 인도네시아에 들어왔을 당시 수카르노는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감옥에 있었는데, 일본군에 의해서 풀려났다. 이후 그는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주민을 강제 징용하여 전쟁터로 내모는 것을 도왔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나중에 자서전에서 일본을 도왔던 자신의 판단을 후회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국과는 달리 인도네시아는 지금도 일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일본이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로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도와준 고마운 나라로 여긴다.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짧은 기간 동안 14,000개가 넘는 섬들 중에는 일본군을 구경도 못 한 섬도 많을 것이다. 그에 반해 네덜란드는 수백 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지배했기 때문에 이 섬 저 섬에 약탈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인 중 일부는 일본이 네덜란드를 쫓아내 준 고마운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 왜곡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인도네시아 역사가 일본에 의해 얼마나 왜곡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8월 17일에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했고, 인도네시아의 독립 기념일은 8월 17일이 됐다. 그런데 일본이 물러가자마자 네덜란드가 다시 쳐들어왔다. 네덜란드의 재침략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는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않고 이 섬 저 섬에 흩어진 서로 다른 종족들의 느슨한 연합 불과했다. 따라서 일본이 빠져나간 인도네시아는 재차 밀려 들어오는 네덜란드의 군대에 맞서서 싸울만한 힘이 아직 없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재침공은 1949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 재침공 시기에 네덜란드는 나치 독일에 침탈당한 것을 인도네시아에서 다시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전례 없이 심하게 약탈을 했다고 한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민족자결주의의 바람을 타고 하나 둘 독립하던 시기였다. UN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인정해줄 것을 네덜란드에 촉구했고, 미국이 UN과 함께 네덜란드를 힘으로 압박했다. 네덜란드와 UN은 1949년 12월 27일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합의하면서 인도네시아는 진정한 독립을 이루어 낸다. 마침내 진정한 독립을 맞이한 인도네시아에서 수카르노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강력한 중앙 집권제 국가만이 외세의 침입에 대항할 힘을 가질 수 있음을 역설했다.


 나는 동쪽 파푸아 섬에서부터 서쪽으로 아체 지역까지 비행기로 무려 7시간이나 걸리는 이 넓은 섬나라가 어떻게 하나의 국가로 합쳐질 수 있었는지 정말 궁금했다. 인도네시아 근대사를 살펴본 후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을 한데 뭉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려 700개가 넘는 다른 언어를 쓰는 수많은 민족들이 뒤섞여 있는 아름다운 섬들은 느슨한 연방제 국가가 더 어울린다. 하지만 이들은 식민 지배의 아픈 기억 때문에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갖춘 대통령제 국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나중에 여기저기서 분리독립 분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는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었지만, 수카르노는 모택동과 만남을 갖기도 하였고 중국과도 친하게 지냈다. 인도네시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기에는 조각조각 나누어진 수많은 섬들을 일일이 컨트롤하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라는 신생국가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 시스템의 많은 부분을 차용해 왔다.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보다 공산주의 시스템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수카르노의 이러한 친중 노선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으리라 본다. 어쨌든 인도네시아는 하나의 어엿한 국가로 자리 잡았고, 수카르노는 종신 집권을 선언한다. 한국의 경우 국민들의 반발로 이승만이 하야한 것 대비된다. 수카르노는 1965년 군부 쿠데타로 축출되기 전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다. 1966년 쿠데타에 의해 대통령 직에서 축출된 수카르노는 가택 연금상태로 지내다가 1970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그 당시 69세까지 산 것은 인도네시아 기준으로 충분히 오래 산 것으로 볼 수 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즘도 인도네시아인 남성의 기대수명은 69.4세에 불과하다)


수카르노와 일본인 아내 데위


 수카르노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을 도운 것을 후회한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그가 친일파였던 점은 명확하다. 수카르노는 이미 부인이 둘이나 있었지만, 나중에 데위(일본 본명은 Naoto Nemoto)라는 이름의 일본 여자를 셋째 아내로 들인다. 인도네시아에는 이슬람 문화권이라서 지금도 일부다처제가 허용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본인 셋째 부인이 게이샤 출신이라는 점이다. 풍문에 의하면 데위는 일본이 전 후 인도네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일종의 미인계로 보내진 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가 외국 여자를, 그것도 게이샤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소식을 듣고 온 나라가 들고일어났지만, 이미 수카르노의 마음은 데위에게 빼앗긴 뒤였다. 이후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인도네시아의 국가 기간산업을 대부분 손에 넣었다고 한다. 2020년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굴러 다니는 자동차의 약 97%가 일본차로, 일본 본토의 일본차 비율 약 94% 보다 일본차 비율이 더 높은 이상한 나라다. 이렇게 되기까지 초석을 놓은 사람이 바로 수카르노의 셋째 부인인 데위 여사(나오토)가 아니었을까? 역사란 정말 알 수 없다.

  

 수카르노는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친일파이기도 한 모순적인 사람이었다. 또 공산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대통령제를 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마치 김구와 김일성,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섞어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서 인도네시아 독립의 아버지로 역사 속에 남게 된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수카르노를 매우 존경한다. 자카르타 국제공항의 이름인 수카르노-하타는 바로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와, 초대 부통령 하타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고, 인도네시아 전역의 수많은 도로에 잘란(Road) 수카르노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다음 시간에는 군부 쿠데타로 초장기 독재를 한 수하르토에서부터 최초의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현 대통령 조코위까지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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