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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r 24. 2021

냉장고를 비우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밥상머리에서 배우는 인생

신혼살림으로 장만한 냉장고였다. 어느 순간부터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지지도, 자주 들리지도 않았다. 별거 아닐 거라 여겼지만 별거가 아니었다. 그날도 저녁을 먹고 TV를 보면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거슬리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봐도 모르지만 안 보면 안 될 것 같아 여기저기 둘러봤다. 눈으로 봐서는 알 수 없었고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어서 다음 날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냉장고는 그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우리가 잠든 새벽 어느 때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말았다.

이른 아침, 냉장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거슬리던 그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뒷 목이 싸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모든 죽음은 흔적을 남긴다고 했던가. 냉장고 밑으로 베어난 물이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냉장고의 사망과 동시에 냉장고를 믿고 의지했던 많은 음식들도 생을 다하고 말았다. 갈 곳을 잃은 음식들이 싱크대 위로 펼쳐졌다. 새 냉장고가 들어오기 전까지 회생이 가능한 음식은 보호조치에 들어가고, 불가능한 것들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제야 지난 5년 동안 냉장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었는지 눈에 들어왔다. 1주일에 한 번 꼴로 장을 봐 재 놓으면서 많이 산다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먹을 만큼 적당히 샀고, 산 건 거의 다 먹어 없앴다고 믿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건 내 생각과 반대의 풍경이었다. 냉장고의 고장은 그동안 냉장고에게 몹쓸 짓을 해왔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올해 초 성과급이 나왔다. 집안에 바꿔야 할 것들을 머릿속에 그렸고 슬그머니 냉장고도 끼어 넣어봤다. 처음 샀던 냉장고가 장렬히 전사한 후 8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행이 지난 디자인이지만 냉장과 냉동이 필요한 식재료들을 훌륭히 지켜내고 있다. 혹시 냉장고를 바라고 있는지 슬쩍 아내옆구리를 찔러봤다.

"내가 아는 사이트를 보니 요즘 유행하는 냉장고 할인을 많이 하더라고. 이참에 바꿔볼까?"

"아니. 잘 돌아가고 있는데 뭐하러."

"디자인도 그렇고 식재료 채울 공간도 부족한 것 같아서."  

"부족하지 않아. 정리만 조금 하면 아직 쓸만해."

아내의 말이 맞다. 냉장고는 정리만 잘하면 늘 새것처럼 쓸 수 있다고 한다. TV에 나오는 살림의 고수들은 한결같이 냉장고 정리를 1순위로 꼽니다. 어떤 식재료가 어디에 얼마큼 있는지 알고 있는 게 알뜰한 살림의 시작이라고 강조한다. 또 그렇게 정리된 냉장고는 성능도 나아지고 수명도 길어진다고 한다. 수시로 정리해주면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고장 나기 전까지 제 성능을 발휘하는 냉장고와 동고동락 할 수 있을 거다.

냉장고가 최적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준 용량이 있다. 기준 용량을 지키면 그 안의 식재료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냉장고가 제 역할을 못 하는 건 두 가지 경우인 것 같다. 하나는 앞서 말한 대로 정해진 용량보다 많이 보관할 때다. 엘리베이터가 원활하게 이동하기 위해 탑승인원을 제한하고, 요리의 제 맛을 내기 위해 양념을 개량해 넣는 것과 같이 이치일 거다. 다른 하나는 기계적 결함 때문이다. 수많은 부품이 자기 자리에서 정해진 역할을 할 때 제 성능을 발휘한다. 이 중 하나라도 고장 나면 연쇄작용에 의해 제 기능을 못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원인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지나침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슨 일이든 과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흔히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공을 쌓아오다 인기를 얻은 연예인, 긴 시간 갈고닦은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운동선수, 자신의 분야에 정진하여 탁월한 성과로 역량을 인정받는 직업인이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원하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하지만 의욕이 앞선 과욕은 결국 한계를 불러오고 짧은 시간 만에 손에 든 기회를 날리게 된다. 이를 두고 심리학 용어로 '번 아웃 증후군'이라고 한다.  한 가지 일에 지나치게 집중해 정신과 신체에 무리가 되고 이로 인해 피로감, 무기력, 자기혐오 등의 증상을 불러오는 걸 말한다. 냉장고에 빈 공간만 보이면 이것저것 욱여넣은 탓에 새로 산 냉장고를 몇 년도 못 쓰고 버리게 된 것과 같은 거라 생각한다. 


"쌀 씻을 기운도 없는데 저녁에 족발 시켜먹으면 안 될까?"

"그래 시켜먹고 밥 할 시간에 좀 쉬자. 나도 오늘은 유난히 피곤하네."

작년부터 배달음식을 먹는 횟수가 늘었다. 식당 가서 먹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배달이 안 되는 음식이 없는 것도 이유가 되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시켜먹으니 식재료를 사는 횟수도 줄었다. 필요한 건 가까운 슈퍼에서 그때그때 소량으로 구매하게 되었다. 자연히 냉장고도 빈 공간이 많아졌다. 이런 걸 의도한 건 아니지만 최근의 현상을 따라가다 보니 냉장고에겐 이런 반사이익도 생기게 된 것 같다. 

냉장고의 효용을 고민해보면서 그동안 너무 채우는 데만 집중하고 살지 않았나 생각했다. 부족한 역량을 계발해야만 남들과 같아질 거란 욕심. 누가 정해놓은지도 모를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사는 일상. 나에게 부족한 모습만 보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다. 반대로 부족한 면도 있지만 분명 장점도 있다. 냉장고가 최대 효율 발휘하는 때가 적당히 빈 공간이 있을 때일 거다. 우리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욕심만 부린다고 모든 걸 다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론 포기도 하고, 때론 거절도 할 때 비로소 빈 공간이 생긴다. 그렇게 생긴 여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팍팍한 일상 속에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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