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8. 25. 07:37
비는 언젠가 그칩니다. 한 여름 무더위도 지나갑니다. 귀를 괴롭히던 매미도 귀뚜라미가 나오면 자취를 감춥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게 변치 않는 진리 중 하나이지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를 괴롭히던 것들도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순간을 견디는 힘입니다. 일단 견디고 나면 다른 무슨 수가 생길 테니 말입니다.
주말과 휴가는 언제나 아쉬움이 남습니다. 떠날 때의 흥분보다 돌아갈 때의 아쉬움과 불안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주말 포함 4일을 쉬고 출근했습니다. 차분하게 시작한 아침은 태풍의 전조였나 봅니다. 사장님이 부릅니다. 전날 상무님이 수정해서 올린 기안서를 내밉니다. 내용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구매 기안의 원칙은 최저가, 3곳 이상 비교 견적입니다. 이번 기안도 원칙을 지키기는 했습니다. 다만, 사전에 상무님 선에서 업체와 금액이 결정되었습니다. 저는 지시하는 대로 견적을 받고 금액을 조정하고 기안을 작성해 올렸습니다. 상무님은 별다른 말 없이 사인을 했습니다. 그 사인에는 자신도 책임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결재를 받기 위해 사전에 조율이 되었다면 사장님도 아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제게 묻는 건, 왜 금액이 고만고만하냐는 것입니다. 이어서 의심의 경계를 풀지 않고 견적 과정이 정당하게 진행되었냐고 되묻습니다. 말을 못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했다가는 상무님이 난처해질 것 같았습니다. 또 한편으로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제 역할인 것도 같았습니다. 일단은 입을 닫았습니다. 열을 내는 사장님과는 반대로 입을 닫고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어쩌면 저의 묵비권이 사장님의 짐작을 정당화시켜준 것일 수 있습니다. 이어진 추궁(?)에도 저는 말을 아꼈습니다.
다 까발리고 때려치우겠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마스크를 썼기에 망정이지 안 썼으면 터진 입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쏟아져 나왔을 것 같았습니다. 나에게 따질 게 아니라 상무님을 통해 들어야 했습니다. 당장에 눈에 보이는 저에게, 제가 일을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한 사장님의 질책만 이어졌습니다. 들을수록 어이가 없고 손발이 떨렸습니다. 이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해버리면 짐을 싸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찰나의 감정이 들었습니다. "이대로 말해버리고 때려치울까?", "아니다, 처자식 생각하자, 지금 당장 갈 곳도 없다, 일단 참자." 마스크 안에서 입을 뻥긋하며 속에 담은 말을 했습니다. 마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듯이 말입니다. 사장님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다시 부르겠다며 마무리했습니다.
사무실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습니다. 다들 제 눈치를 봅니다. 저도 건드리지 말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남은 하루 동안 마스크를 쓰고 입을 닫았습니다. 사장님과 상무님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지만 추가 한 곳 견적을 받는 걸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기분은 여전히 똥 같았습니다. 말할 기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일 때문에 거래처에 전화를 하고, 통화하며 실없이 웃고, 깎아달라고 읍소를 했습니다. 사무실에 남기를 선택했으니 근무시간 동안은 제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근근이 시간을 때우고 퇴근했습니다. 그냥 집으로 갈 수 없어서 운동하러 갔습니다. 무게 나가는 기구를 들기보다 생각 없이 달리고 싶었습니다. 저질 체력이라 미친 듯이 뛰지는 못했습니다. 트레이드밀에서 2킬로미터 뛰었습니다. 얼굴에 땀이 흥건합니다. 씻으며 생각했습니다. '참았으니 일단은 더 버텨보자' 성급하게, 감정적으로 판단하지는 않아서 적어도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나만 다행이었습니다.
9번의 이직 중 3번은 즉흥적으로 판단했었습니다. 찰나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후회할 선택을 했습니다. 지나고 나니 그 순간이 가장 후회됩니다. 그 순간을 후회하는 후회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제 자신을 수련해왔습니다. 앞서 일은 지금까지 수련해온 저를 시험하는 자리였습니다. 저는 잘 버텼습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그 순간은 참는 게 맞았습니다. 순간적인 판단은 결국 후회만 남긴다는 걸 다시 한번 배웠습니다. 그 순간을 참은 덕분에 오늘도 어제와 같은 일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 일상이 영원하지 않겠지만 대책 없이 뛰쳐나가는 미련한 짓은 안 하려고 합니다.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집니다. 이대로 제 역량을 키워 붙잡고 싶은 직원이 되었을 때 사표를 던질 것입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라고 생각합니다.
큰딸에게도 참지 못하는 순간이 자주 올 겁니다. 그때 이 말만 기억했으면 합니다. "영원한 건 없다, 지금 이 순간도 지나간다." 감정에 못 이겨 판단하기보다 판단을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미칠 듯이 화가 나도 그 순간에는 입을 닫으라고요. 그럴 때 나오는 말은 결국 다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게 후회일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저도 여전히 힘이 듭니다. 그래도 한 번 두 번 참다 보면 실보다 득이 많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좋은 게 많다는 걸 몸소 체험하게 되면 참는 것도 수월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더 좋은 판단을 내리기 위한 과정인 것이지 무조건 참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분명 더 좋은 대안을 찾을 수도, 더 나은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안을 찾고 방법이 구해지면 그땐 냉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상황은 언제든 변하기 마련입니다. 상황을 주도하는 건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섣부른 판단은 상황에 끌려가는 꼴밖에 안됩니다. 저의 후회를 거울 삼아 두 딸은 현명한 선택을 하는 당당한 어른이 되었으면 합니다.
2022. 08. 25. 0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