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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소유예 5년

by 김형준

2022. 11. 05. 07:10



서른아홉, 새 직장을 얻었다. 일곱 번째 이직이었다. 조건만 따지면 이전 직장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출근 시간 15분, 연봉은 20퍼센트 올랐다. 집에서 가깝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다닌 직장은 1시간 이상 걸렸다. 일에 지친 몸은 길에서 또 한 번 시달렸다. 그러니 늘 집에서 가깝고 월급도 많이 받는 직장을 꿈꿨다. 그런 바람이 모두 이루어진 직장이었다. 지하철 타러 새벽에 나서지 않았고,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고, 출근 전 운동도 했다. 또 퇴근하면서 사람들 틈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오른 연봉 덕분에 중형차로 갈아탔다.


업무는 단조로웠다. 복잡한 숫자가 담긴 서류도 없었다. 까탈스럽게 구는 상사도 없었다. 대부분의 업무는 지시받은 대로 구매한 뒤 선적해 파푸아뉴기니 현장으로 보내는 게 전부였다. 외근이 많았고 가끔 1박 2일 출장으로 기분 전환도 했다. 무엇보다 운동하고 출근하면서 자신감도 끌어올렸다. 상상했던 일상이 현실이 되었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준 대표를 믿기로 했다.


사람을 쉽게 믿는 건 나이 들어도 고쳐지지 않았다. 월급이 안 나왔다. 다음 달에는 꼭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약속을 믿은 건 지금 일상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속만 지켜지면 굳이 다른 직장을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 어디로든 옮길 수는 있겠지만 이만한 조건은 다시없을 게 짐작됐다. 그러니 현재로서 믿고 기다리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막연한 기대는 1년간 이어졌다. 믿음에 대한 대답은 거짓말뿐이었다.


1년 치 월급을 받아내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우선 노동부에 임금 체불로 대표를 신고했다. 근로감독관은 해결을 위해 대표를 소환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대표는 오히려 배신자라고 우리를 몰아세웠다. 왜 자신을 믿지 못하냐고 따졌다. 언제까지 믿어야 되냐고 물었지만 확답은 없었다. 입장 바꿔보면 당신은 그런 대표를 믿을 수 있냐고 묻고 싶었다. 마음의 등을 돌리니 못할 게 없었다. 노무사에 의뢰해 체당금 신청을 했다.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까지 3개월 걸렸다. 통장에 찍힌 금액은 3개월치 급여에 수수료를 제하고 들어왔다. 이제 남은 9개월치를 받아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법원을 통해 대표의 재산 상태를 조회했다. 압류할 만한 게 없었다. 그동안의 행태를 되짚어보면 아마도 대표는 가족 명의로 모든 재산을 돌려놓은 걸로 짐작됐다. 그나마 가능한 건 법인 명의 재산이다. 재산이래 봤자 사무실 집기류가 전부였다. 딱 하나 있었다. 그 당시 파푸아뉴기니 현장으로 보내려고 1억 원에 구매해 놓은 장비 부속이 있었다. 이것만 처분하면 남은 월급은 해결할 수 있다. 장비는 선적 대행업체에서 보관 중이었다. 가압류 신청을 해놨지만 결정은 나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이 상태에서 물건을 옮기면 범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가압류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소유권은 원 주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때 내가 물건을 옮기면 절도에 해당된다. 대표는 가압류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물건으로 옮기려고 했다. 대행업체에서는 대표가 장비를 옮기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알려줬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선택해야 했다. 눈앞에서 물건을 빼앗기고 말 것인지, 아니면 죄인 줄 알면서도 물건을 지켜야 할지를. 대행업체는 우리 편이었다. 운반할 차량을 수배해주고 차에 싣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문제가 생기면 오롯이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우리가 먼저 움직인 걸 눈치챈 대표와 가족은 온갖 협박을 일삼았다. 심지어 장비를 옮기는 순간 절도로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말이야 방귀야! 누가 누구를 신고한다는 거지. 사과하고 장비도 처분할 수 있게 돕는 게 사람 된 도리일 텐데,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다. 밟으려고 하니 더 밟히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장비는 우리가 마련해 놓은 장소로 옮겼고 얼마 뒤 가압류 결정이 났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구미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대표가 나를 절도범으로 신고를 했다고. 경찰에 출석하기 전 장비는 가압류 신청을 했던 대행업체로 다시 옮겨놨다. 경매는 가압류 신청 당시 주소지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장비를 되돌려 놓아야 했다. 가압류 결정이 된 이상 대표도 손을 못 댄다. 그나마 안전장치를 마련해놓고 출석할 수 있었다. 죄는 지었지만 마음은 당당했다. 하지만 형사 앞에서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사건 경위 묻는 형사의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했고, 그러는 게 대표에게 지지 않는 거로 여겼다. 책상 밑에서는 손바닥을 연신 바지에 문질렀지만 티 내지 않았다. 30여분 진행된 진술 이후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서명을 하라고 펜을 건네받았다. 심호흡을 하고 펜을 받아 들었다. 진술한 내용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하는 곳에 호흡을 멈추고 사인했다. 조사가 끝나자 그제야 형사는 내 상황에 공감해줬다. 같은 월급쟁이여서 화는 나지만 죄는 피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혼자 한 게 아니어서 일반 절도가 아닌 특수 절도에 해당되고 검찰 조사까지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경찰서 조사만 받고 끝나길 바랐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첫 번째 경매에서 누군가 낙찰되길 바랐다. 그래야 남은 월급을 온전히 되찾을 수 있었다. 바람은 스치는 바람이었다. 두 번, 세 번 유찰되는 중에 검찰에서 연락이 왔다. 정해진 날짜에 출석했다. 입구에서 경비원이 방문 목적을 물었다. 피의자로 조사받으러 왔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얼버무리니 눈치를 채고 방문증을 내어줬다. 방문증을 받아 들고 보안문을 열고 들어가려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나 이대로 들어가면 내 발로 못 나오는 건 아닐까. 엘리베이터 안에 동료와 나란히 섰지만 서로 문만 바라봤다. 검사는 말이 적었다. 마주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내어주려고 옆에 섰는데 머리 하나가 더 있었다. 마른 몸 탓에 더 커 보였다. 보이는 모습과 달리 말투는 부드러웠다. 죄를 묻기 전에 공감부터 해줬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며 위로도 건넸다. 이미 사건 기록 검토가 끝났는지 질문은 없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물었다. 인정한다고 대답했다. 그럼 인정한다고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 어떤 내용으로 써야 하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말이다. 자리를 옮겨 A4 한 장을 앞에 두고 쓸 말 생각했다. 왜 어떤 경위로 그래야 했는지 진심을 담아 적었다. 손에 힘을 주고 썼지만 글씨는 삐뚤빼뚤 이었다. 진술서를 받아 든 검사는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내 발로 걸어 나왔다.


네 번의 유찰 끝에 낙찰자가 나왔다. 첫 경매 결정 가는 7천만 원이었다. 네 번째 경매에서 낙찰자가 지불한 금액은 17백만 원이었다. 경매 수수료를 제외하고 내 손에 쥔 건 8백만 원이었다. 서울과 구미를 오가고 경찰과 검찰 조사를 받은 것에 비하면 결과가 씁쓸했다. 한 가지 위안은 검사는 나에게 '기소 유예 5년'을 결정했다. 5년 동안 또 다른 죄를 짓지만 않으면 이번에 지은 죄는 용서하겠다는 의미였다. 검사의 결정에 최악을 피했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1년 넘게 이어진 싸움에서 연봉의 절반만 건졌고, 기소유예 5년의 딱지를 다는 걸로 일단락되었다. 남은 월급은 더 이상 받아낼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당장은 그 돈을 잊자고 했다. 뻔한 말이지만 정의가 살아있다면 언젠가 대표는 큰 벌을 받을 것이며 그때 못 받은 돈도 다시 우리 손에 들어올 거로 믿기로 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2022. 11. 0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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