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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된 공간에 처음 앉다

by Lamie


책상 위를 닦고,

구석에 쌓여 있던 상자를 비우고 나니

작은 자리가 생겼다.


햇살이 한 뼘쯤 들어오는 오후,

그 자리에 처음 앉았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마련한 자리.


머그컵에 따뜻한 차를 담고

한 모금 마셨다.

향이 퍼지고,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촉이 선명했다.


정리가 다 된 건 아니었다.

구석엔 여전히 버릴까 말까 망설이는 물건들이 있고,

책장엔 어지러이 꽂힌 책들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이 순간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만든 작은 섬에 앉아 있었다.


그때,

문이 살짝 열렸다.

딸이었다.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고 말했다.

“오, 좀 깔끔해졌는데?”


나는 웃었다.

“조금 정리했어. 나만의 방이거든.”


딸이 조용히 들어와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그녀도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둘 다 뭔가 알고 있었다.


말없이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이 공간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는 걸.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엄마, 여기 좋아. 그냥… 엄마 같아.”


그 말이

가슴 깊숙이 내려앉았다.

‘엄마 같아’—

그 말 속엔

지금 이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암묵적인 인정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정리는 물건만이 아니라,

관계와 마음도 조금씩 다시 정돈해주는 일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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