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박사의 강연을 보다가 '우울한 엄마에게서 자란 아이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된다'라는 말이 어느 날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들어왔다. 나는 그 말이 왜 그렇게 마음 시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우울한 엄마에게서 자랐다.'
나는 엄마의 기분에 따라 그날 하루가 결정되는 롤러코스터 같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심리학 책들에선 종종 이런 문구가 나온다. '어린 시절 상처 받은 내 안의 아이와 대면하고 직시해야 상처가 사라진다'라는 류의 문구. 하지만 그것은 상처 준 사람이 먼저 인정을 하고 상처 받은 이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다. 상처 받은 이가 아무리 인정하라고 소리도 쳐보고, '내가 더 잘해주면 상처를 준 사람도 더 잘해줄 것이야.' 하며 더 잘하려고 애쓴다 하더라도 변함이 없이 '우울한 엄마'라면? 상처 받은 아이를 품은 채 다 자란 어른인 나는 차라리 눈을 감고 모른 체하고 지내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내 딸에게만큼은 항상 평정심 있는, 한결같이 따뜻한 엄마가 되리라, 마음먹곤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결혼 생활과 육아와 모든 것이 익숙해질 때쯤, 인생이 너무 단조로워서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나라는 인간은 좀 복잡하고 고민스러워야 살만하다고 느끼는 진짜 몹쓸 성격이구나,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기에 어쩌면 '엄마'라는 것이 나의 적성에 딱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모성애'나 '잔정' 이런 것보다는 미묘 복잡한 '엄마'라는 위치의 인간. 나의 엄마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 나의 유년기와 내 딸의 유년기는 달랐으면 하는 욕심. 나는 기를 쓰고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엄마로 사는 노력'은 그럭저럭 할만하면서도 가끔씩 나를 너무 죄여 오곤 했다. 외로워서, 쓸쓸해서, 아니 그것보다도 더 큰 차원은 내 딸이 상처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그 모든 상처를 대신 받고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이의 먹는 것, 자는 것, 자라는 것, 아이의 한 해 한 해가 나의 손과 말과 행동에 닿아있다는 게 너무 두렵다. 그리고 한편으론 즐겁다. 참으로 이중적이지만 엄마 됨과 동시에 어쩌면 나는 나의 이중성을 최대한 발휘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란 건 뭘까? 내가 원하는 삶, 내가 그려내는 삶. 그런 것들이 점점 희미해지고, 하고픈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나는 그냥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만 남아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 딸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내 딸아이에게 '우울한 엄마'로 남을 생각도 전혀 없다. 삶의 해답을 찾고 싶어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라는 걸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나는 우울한 엄마에게서 자랐다. 그리고 정말 빨리 어른이 되었다. 결국엔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면 상처 받은 나도 상처를 준 사람도 모두 인정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 모든 역할들이 서로가 간절히 원해왔던 자리도 아니었다는 걸, 적어도 스스로에게 우스워지지 말자고 오늘도 다짐한다.
내 딸은 올해 10살이 되었다. 가끔씩 십 대가 된 딸아이의 행동이나 말투가 거슬릴 때면 나의 십 대를 되돌아본다. 말 수도 없고, 외로웠고, 잔병치레 투성이었던 비쩍 말랐던 10대의 나. 그렇게 비교가 끝나고 나면 괜한 걱정에 차라리 감사함을 더해본다. 우울함을 먹고 자랐던 나와 달리 내 딸은 쑥쑥 잘 크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조금은 비틀어진 비교 대상이지만 나는 그래도 감사하다. 우울한 엄마에게서 자라서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기에 나는 표현에 어리숙하고 나의 감정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몇 번이고 고민하고 생각한다. 좋은 어른이라 단정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자꾸만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자랐다. 누군가는 나에게 너무 냉정해 보인다고 한다. 표정 없는 얼굴, 잘 웃지 않는 눈과 입, 툭 내뱉는 말투. 우울함을 먹고 자란 아이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매일 같이 사랑을 먹고 자란 내 아이의 표정을 보면서 말이다. '엄마는 아이의 거울'이라는 말이 나는 너무나 싫다. 나는 거울 속 나의 엄마와 다르게 되기를 항상 바라왔다. 거울 속의 엄마가 아니라, 내가 생각한 엄마의 모습으로, 원하고 상상한 엄마로 늙어가고 싶다.
그래서 나는 매번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냉정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