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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Emilia Moment Aug 31. 2024

'기억해 둬,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아니야'

누렇고 진득한 진땀 같은 문장, 구병모의 <위저드 베이커리>


책의 맨 뒷장을 보니

'초판 53쇄 발행 • 2019년 5월 13일'

2019년이면... 아이가 5학년 무렵. 베스트셀러에 창비청소년문학상까지 받았다기에 유명세만 믿고 무작정 사들였던 책.

독서 수준이 빨랐던 아이가 나무집 같은 시리즈처럼 재미나게 읽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이는 조금 읽더니 읽기 싫다 했다. 의아해하며 '이 책 엄청 유명한 책이야. 친구들 다 읽는데 너만 안 읽으면 어떡해?'라며 타박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내 성화에 아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의 책장을 수차례 업데이트하는 와중에도 남겨진 걸 보면 안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참 다행이다.



나 역시 왠지 모르게 손이 가질 않았다. 위저드 베이커리라니... 마법, 환상 이런 건 내 취향이 아니니까. 게다가 작가 이름마저도 청소년도서를 쓰는 사람치곤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편협한 걸까? 이름 가지고 그러면 안 되는 거지만 아무튼 그런 아우라를 풍겼음은 사실이다. 구병모는 필명이고 작가의 본명은 정유경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고 나선 지난날의 인상이 영 틀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아무튼 그렇게 서가에 방치된 채 묵혀 있던 책을 5년 만에 읽어봤다...  그리고

깊은 반성. 아... 난 정말이지 이토록 부족한 엄마였구나. 묻지 마 투자도 아니고 내용도 모른 채 단지 유명하다는 이유로 아이의 나이대에 맞지 않는 책을 꾸역꾸역 들이밀었던 성미만 급하고 실은 게으른 엄마.


책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는 아이를 은근히 타박했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겠다. 이토록 적나라하고 그로테스크한 책이라니. 성인인 내가 지금 읽어도 불편한 구석이 꽤 있다. 그래서인지 뒤에 개정판이 나왔다고 한다.

선택은 독자의 몫일 테지만 어린이, 청소년 도서를 선택하는 부모라면 제목과 표지, 유명세만 보지 말고 내 아이의 연령대에 맞는 책인지 세심하게 따지고 가능한 먼저 읽어봐야 함을 절감한다.​





구병모의 문장은 누렇고 진득한 진땀 같다.



부모가 아닌 독자로서는 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소설 속 문장 사이사이 구병모 작가를 직접 마주하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 때문에 스토리 흡인력은 다소 떨어졌으나 문장과 문체에 대한 영감을 받는 좋은 경험이었다.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는.


구병모의 문장은 누렇고 진득한 진땀 같다. 아무리 조심히 입어도 하얀 셔츠 깃에 배어나는 누런 진땀처럼 삶의 고통과 번민과 애씀은 붉고 끈적한 핏빛도 맑고 투명한 눈물 빛도 아닌 누렇고 진득한 진땀이 아닐지.

진땀 흘리며 살아온 그녀의 삶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졌을 쉬이 지워지지 않는 누런 빛깔의 진득한 문장들. 나 또한 목깃에 밴 진땀 같은 지난 시간들을 소환하며 진땀 흘리며 읽게 된다. 아마 내게도 그녀처럼 다분히 그로테스크하고 시니컬한 면모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 이면에는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이 있기 때문일 테고. ​​




내 안에 남겨진 그녀의 진땀 같은 문장들.


건조하지도 눅눅하지도 않은 오늘분의 감정을 꼭꼭 씹어, 마음속 깊숙이 담아둔 밀폐 용기에 가두기 위해.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사람은 자기가 애당초 가져본 적이 없거나 너무 일찍 빼앗긴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품지 않는다.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아쉬움도 미련도 없다는 말이 이토록 깊은 슬픔일 수 있음을)

그러나 이곳의 마법사가 만드는 빵이라면 좋아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빵에는, 잘못 사용하면  조금은 위험한 향신료일지 몰라도, 과거와 현재 대신 미래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감정과 풍선의 공통점은 비가시권의 높이에서 제풀에 폭발해 버린다는 것.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서 오는 아픔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자신의 아픔은 자신에게 있어서만 절댓값이다.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인간한텐 지금 주어진 세상조차 과분해. 자기 일 하나 감당 못하는 녀석이 누굴 상대로 오지랖을 떠는지.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네, 오지랖 떨지 않겠습니다.)


누군가 이런 단순한 한마디로 나를 오해 대신 인정해 준 적이 있었던가.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해왔던가)​​


언제나 옳은 답지만 고르면서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은 인생에서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없나요?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많죠. 매우)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가장 바라는 건 찬란한 문장을 얻는 거예요.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저도요)


목적어의 자리에 무엇을 놓든 간에, 내가 바라는 건 "지금이 아닌 어떤 것'이에요.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기억해 둬,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아니야.
-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2019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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