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의 위로 : 용기를 드려요
준호는 아무리 친하게 지내도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았다. 일부러 숨겼다기보다는 어떤 것-복잡한 감정이나 문제 따위-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았다. 자신의 문제가 타인과 나눠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은 못 된다는 내향성이 깃든 겸손함도 작용했다.
《곁에 남아있는 사람》, 임경선
정확히 글 속의 준호와 같은 이유로, 마음속 깊은 고민을 남들과 잘 나누지 않는 편이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자체적으로 선별 후, 나눠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가까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한다.
신기한 건 내 문제를 잘 나누지 않는 사람치고는 주변 사람들의 고민을 자주 접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 친구, 그리고 상담으로 인연이 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고민상담소를 여러 번 열었었다.
'힘내!' 라는 말을 듣는 순간 힘이 빠지는 특이한 성향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 잘될 거야•힘내•괜찮아 같은 류의 위로는 버블리의 고민상담소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위로를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이번 글에서 풀어보려고 한다.
Self Q&A : 나 사용 설명서 13화는, MBTI T성향인 내가 타인을 위로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들보다 늦은 시작에 불안해하는 학생들에게
한국에서 아이엘츠 상담일을 할 때,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고민이다. 약 1년 동안 내가 만났던 300여 명의 학생들 중, 고등학교를 이제 막 졸업한 학생들의 비율은 10%가 될까 말까였다. 대부분은 퇴사 후 유학을 계획하는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스물일곱에 캐나다 유학을 준비하던 나도 여기에 속했다.
이제 막 안정적인 시기로 접어들기 시작할 때,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게 얼마나 막연하고 불안하게 느껴지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같은 고민을 해봤으니까. 하지만 직접 그 시기를 겪어서 통과해 보니, (그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진심으로 나이 먹고 유학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그렇다고 '저도 잘했으니까 00님도 잘하실 거에요'는, T사고형 인간 기준으로 너무 얕다고 느껴지는 위로였다.
상담실에서 같은 고민을 여러 번 마주하다 보니, 나는 그들을 위로가 아니라 이해를 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위로는 그 순간뿐이었다. 그들이 느끼는 불안함을 잠깐 잠재워주는 게 아닌, 해소를 시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스물여덟에 유학을 가서 좋았던 이유를 누가 봐도 명확하게 이해가 되는 한 편의 글로 작성해서 컨텐츠로 만들었다.
게시물 아래에는 나와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얕은 위로로는 끌어낼 수 없었던 반응이었던 걸 보면, 이해가 되는 위로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이미 내린 선택을 후회한다는 친구들에게
친구들의 단골 고민이다. 후회의 내용은 전부 다 달랐지만, 모두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때에도 내가 건넨 건 역시 T식 위로였다. 내 입에서는 괜찮아 이미 지난 일이야, 다 경험이지 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라는 말들 대신 이런 말들이 먼저 나온다.
-그래도 이번에 해봐서, 적어도 나중에 '아, 그때 그거 해볼걸' 하는 후회는 없잖아.
-너랑 안 맞는 일(또는 사람)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거니까, 너에 대한 데이터가 늘어난 거 아니야? 이제부터는 너한테 더 맞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도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그때 나를 후회하게 했던 일(또는 사람)들이 있었던 덕분에 지금 삶에 만족도가 훨씬 높다? 너도 분명히 그렇게 될 거야.
전부 '괜찮아, 후회하지마' 가 아닌, '그럼 이제 그 후회를 어떻게 써먹을지 생각해 보자'의 마음으로 건넨 말들이었다. 이처럼 나는 친구들의 후회라는 감정을 덮어주는 대신, 각자의 후회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성공한 타인과의 비교로 조급해하던 동생에게
내게는 동생이 한 명 있다. 내가 글을 통해 나를 표현하는 걸 즐기는 것처럼, 동생은 동생만의 방식으로 자기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컨텐츠 크리에이터' 라고 불러주며 각자의 길을 각자의 방식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동생이 컨텐츠를 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한 번은 어울리지 않는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내게 고민을 들고 왔다. 당시 솔로지옥 시즌1에 출연해 큰 인기를 끌었던 한 인플루언서와 이제 막 시작한 본인을 비교하다 보니, 위축이 된 거였다. 이해가 되는 위로를 건넬 시간이었다. 당시 내가 동생에게 해준 말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본다.
"야, 프리지아는 이미 그쪽에서는 성공한 인플루언서야. 뭘 올려도 사람들이 반응해 주고 금방 이슈가 되니까, 컨텐츠 올리는 게 얼마나 재밌겠어? 그래서 지금 네가 진짜 멋있는 거야. 너는 이제 시작해서 반응도 거의 없는데도, 좋아서 하는 거잖아. 나는 그게 진짜 멋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이미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랑 비교하지 말고, 계속해."
그래서 계속 했을까?
며칠 전 동생은 목표했던 10K를 달성했다.
이해가 되는 위로의 작동 원리는 간단하다. 그들이 느끼는 불안함, 후회, 조급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무효화하지 않으면서도, 상황을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용기를 주고, 선택은 온전히 본인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 이게 내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식이자 위로하는 방법이다.
나는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고 싶은 마음이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원하지 않는다. 삶이라는 차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그 삶의 주인공이어야만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를 신뢰하고 찾아와 주는 사람들에게 내 방식으로 용기를 주는 일이다. 그렇게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응원이자 영향이라고 믿는다.
오늘의 질문
Q1. 고민이 있을때 찾아가는 사람이 있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Q2. 누군가 내게 고민 상담을 할 때, 나는 어떤 종류의 답변을 해주고 있나요?
Q3. 내가 타인에게 준 가장 큰 영향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