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보이시지만, 속도 무척이나 강한 민영선배의 책
작년 여름 처음으로 서핑을 접했다. 나만큼이나 운동에 늘 진심인 친구들은 서핑을 배워보자며 강원도 양양을 정복해보자는 결의를 다졌다. 어떤 형태라도 새로운 무언가가 반가웠던 꽤나 지루한 여름이었고, 특히 운동이라면 더 좋았다. 나에겐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체육이라는 종목으로 상을 두 번이나 탄 경험이 있었다. 영광스러운 두 번의 상에 취해 한때는 체대생을 꿈꾸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바다에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물에서 하는 운동은 힘이 덜 들지 않을까 짐작하며 대단히 만만한 마음이었다. 강습은 짧게, 자유롭게 탈 수 있는 시간은 길게 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육지에서 이론 강습을 마치고 바다로 나섰을 때 아찔하고도 무기력한 기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찔하고 무기력함. 강사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보드 위에서 몸을 세우면, 뒤에서 쫓아오는 파도가 덮칠 것만 같았다.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어김없이 파도는 나를 넘어트렸다. 간신히 보드를 끌고 파도가 닿지 못하는 모래로 걸어가는 내 모습은 물에 떠밀려가는 미역만큼도 못해 보였다.
무모했던 자신감과 체력이 바닥에 다다를 때쯤 죽기 살기로 패들링해 파도가 없는 더 먼바다로 나아갔다. 잔잔한 바다 위에 보드, 그리고 보드처럼 평평하게 누워 눈을 감고 생각했다. 사람이 파도를 탄다는 생각은 오만하기 그지없다고. 파도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그냥 떠밀릴 뿐이라고.
'파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절로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바다를 바꿀 수 없다. 내가 잘해서 파도 위에 올라탄다는 생각은 건방지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 파도가 잠시 나를 태워줬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미개한 존재냐 하면, 그건 아니다. 노력하면 뭔가는 된다.' (p124)
책을 넘기다 이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당시에 내가 바다 위에서 느꼈던 감정이다. 또 지금 닥친 '취준'이라는 피하고 싶기도, 이겨내보고 싶은 운명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긴 시간을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뒤에서 쫓아오는 큰 파도처럼 느껴지곤 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기회와 위기는 끊임없이 찾아온다. 문제는 상황 자체가 아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숱한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올라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파도를 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겸허한 마음으로 파도와 협업해보겠다는 의지. 그 마음이 중요하다.
'바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각자에게 필요한 걸 내준다. 울고 싶어도 못 우는 이 대신 울어주고,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한없이 쓸려 나갔다가도 다시 하얀 포말로 돌아와 마음을 다독여준다. 바다에는 쉼 없이 오가는 파도처럼 늘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다.' (p172)
선배의 발목에서 우연히 파도를 발견한 날, 어떤 의미일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한 사람을 다 이해하기에 3개월도 안 되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중에서도 선배와 인생이나 그 마음가짐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얼큰한 회식을 즐길 때뿐이었다. (사실 그마저도 취해버렸던 나는 전부 기억하지 못해 애석한 마음이다..) 선배가 발리와 서핑을 좋아하신다는 말을 들었던 날. 어렴풋이 짐작했던 의미보다 더 많은 추억과 결심 같은 것들이 파도 문양을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받았다. 그 파장은 강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파도를 이루는 물이라는 성분의 유연함. 선배와 파도는 닮았다고도 생각했다. 힘에 부치는 날에 와인을 선물해주셨고 눈물을 겨우 참아냈다. 또 일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가감 없이 말해주셨다. 그 유연함과 강함이 좋았다.
여전히 가장 힘들고 어려운 운동이 뭐였냐고 묻는 질문엔 '서핑'이라고 대답한다. 처음 배웠을 당시에 힘들었던 기분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년 여름에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숙소에 돌아와 술을 실컷 마셨다. 그럼에도 책을 읽고 나서 서핑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사람이든 일이든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 파도를 떠올리는 선배처럼, 딱 한 번만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가끔은 포기해버렸고 술로 위로했던 날도 그걸로 끝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딱 한 번만 더'라는 마음으로 재도약했을 때, 꽤 멋지게 파도를 탈 수도 있지 않을까. '파도 사인'이 그려진 이 책은 앞으로 험악한 파도를 만날 때마다 펼쳐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