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기 신도시의 마샤 스튜어트라고 부르는 C언니가 점심을 먹으러 오라고 우리를 불렀다.
친정과 시집 양쪽에 원래 제사가 없어서 명절 트라우마가 적다는 언니가, 처음에는 '추석 기분도 낼 겸 모여서 송편을 빚자'고 제안했는데 우리 모임 며느리들 전체가 거절했다.
추석 당일에 추석 기분이 드는 것도 불쾌한 마당에 일부러 모여서 미리 추석 기분을 내자는 말에 거의 쿠데타가 일어날 뻔했다.
게다가 송편 빚기라니. 언니는 자기가 준비를 다 할 테니 너희는 그냥 와서 재미있게 수다 떨며 송편 빚고 쪄서 먹고 나눠가라고 했지만 그것은 명절 풍경을 전지적 어린이 시점에서 담은 동요 가사 같은 소리였다.
아무튼 그래서 송편 빚기 회동은 동의표가 1도 없어서 호스트께서 급히 '점심 먹기 모임'으로 바꿨다. 역시 점심 먹기 모임으로 변경되니 참석자가 늘었다.
아무 날도 아닌데 집에 누굴 불러서 음식을 해서 먹이는 걸 좋아하는 유니콘이 정말 존재한다. 놀랍게도 나는 두 개의 절친 모임에 한 명씩 있다.
오늘도 C언니의 그릇장 중 하나가 활짝 열렸다.
C언니의 그릇장 1
언니는 살짝 삶아 둔 팥을 넣고 압력솥에 팥밥을 했다. 무채와 겉절이를 곁들인 수육과 배추된장국, 애호박새우볶음, 멸치꽈리고추볶음, 오이소박이, 마늘종볶음으로 점심상을 차렸다.
무화과와 한라봉, 파인애플이 들어간 하몽샐러드도 있었다.
이 얼마나 적극 추천할 회합인가. 모여서 깨송편 빚기 활동보다 훨씬 좋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랫입술 아래에 김가루 같은 큰 점이 있어서 늘 뜯어내고 싶었었다. 할머니가 '그건 먹을복점이라 떼면 안 된다. 너는 어딜 가드래도 밥 얻어먹을 복이 있는 거야.'라며 달래곤 하셨는데 안 떼어내길 잘했다.
언니가 차려준 점심밥상
우리는 디저트로 커피와 레몬케이크를 먹었다. 언니가 쓰는 전자동커피머신은 우리 집의 가정용 수동 드롱기에 비해 무척 간편한 데다 캡슐커피머신에 비할 바 아니게 커피 맛이 좋다.
오십견 극복 중인 이야기, 2학기를 시작한 대학생 애들 이야기, 아직은 회사에 잘 다녀주는 남편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그리고 두 주 후에 있는 민족의 명절 추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잔이 뭐라 그랬지. 알보호?늘 까먹음
일 년에 두 번 있는 설과 추석은 며느리들에게는 그다지 신나는 날이 아니다.
개인별로 상황차가 크겠지만 대부분의 며느리들은 '일 년에 두 번인데 어차피 할 거 즐겁게 하자!'는 파이팅으로 맞이한다. 그 마음만으로 명절을 잘 보낼 수 있는 건 다행인 케이스고 몇몇 며느리들은 '나만 참으면 집안이 다 조용하니까'의 심경으로 인고의 날을 보낼 것이다.
무척 안타깝다.
이혼에 대한 언급이 명절마다 크게 오른다는 데이터를 다룬 기사는 '사실은 우리나라 남자들도 명절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고 지적했다. 기혼남을 흔드는 두 개의 무시무시한 축, 어머니와 아내로부터 오는 진동이 제법 클 것이다.
게다가 명절마다 국민 빌런으로 여겨지는 '시어머니들'도 알고 보면 나름의 명절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분석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명절을 이렇게 열심히 보내는 것인가.
명절을 마뜩잖게 보내야 하는 며느리들의 비율은 빠른 속도로 줄 것이다. 나 같은 X세대가 시어머니가 되고 우리 딸들 같은 MZ가 며느리가 될 테니 당연한 추세다.
우리 시어머니들이 한창 젊은 며느리였을 때와 지금 며느리인 우리만 비교해 봐도 '세상 참 좋아지고 여자 팔자 상팔자 됐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추석이고 나발이고 몰라, 됐다 그래!' 하며 싹 다 안 할 게 아니라면, 이번 주와 다음 주 밥을 잘 챙겨 먹고 명절룩도 하나 장만해서 가기다.
그리고 이번 추석도 1라운드 한판승으로 신속하게 해치우고 내 집에 돌아와 바리바리 싸 주신 것들로 냉장고를 채울 것이다.
시어머니와 아들과 며느리 심지어 머리가 컸다고 할머니집에 가기 싫은 손주들조차 각자 여건대로 스트레스를 받는 K-명절 문화는 그 꼬리가 참 길고 질기긴 하지만 결국은 시대의 흐름 속에 사멸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