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칼과 피자서버, 아이스크림스쿱과 와인디캔터를 갖고 있으면서 미니멀 운운하니 사기꾼 같다.
보통 미니멀이라면 내 손에 맞고 좋은 칼 하나를 두루 쓰고, 국자나 뒤집개도 딱 하나씩 써야 면목이 설 텐데 그게 참 어렵다.
치즈칼은 버터나 치즈가 칼에 들러붙지 않으면서 얇게 썰 때 필요하고 피자서버는 부침개를 나눠 먹을 때도 좋다. 내가 즐겨 사는 큰 통 아이스크림에는 동그랗게 덜어낼 스쿱이 유용하고 디캔터에 와인을 부어서 마시면 만 원 미만짜리도 풍미가 훨씬 좋아진다.
기분에 따라 골라 커피를 내릴 머그도 여러 개 필요하고 접시와 그릇도 많다.
누가 봐도 미니멀한 살림은 아니다.
나의 미니멀은 '집안에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좋아하지 않거나 쓰지 않는 물건은 소유하지 않을' 정도의 물렁한 미니멀이라 하겠다.
미니멀하다고 보기 어려운 싱크대 상부장
우리 집은 전전 주인이 10년 전에 부분수리를 했다.
큰애가 즈이 학교 기숙사 욕실 수납장과 똑같다고 말한 안방 욕실은 22년 전 아파트 입주 때 그대로지만 거실 욕실과 싱크대는 바꿨으니 완벽한 부분수리다.
3년 전 코로나가 급격히 퍼져 집집마다 재택수업, 재택근무가 많던 시기에 이사를 했다.
내가 불편할지라도 남에게 폐는 끼칠 수 없다는 우리 집 가훈을 제대로 실천하려고 '상태 깨끗'이라 소개한 이 집에 도배와 장판만 하고 들어왔다.
(지금 슬쩍 후회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옛날 2 베이 구조에 스무 살이 넘은 집이다 보니 청소를 암만 잘해도 올인테리어를 한 집의 반의 반의 반도 못 따라간다.
살림살이를 정리하지 않으면 더 답답해 보일 것이다.
물건은 제자리에
거실에서 주방으로 가면서 주방 소속 아이템들이 보이면 가져간다. 안방에서 나올 때는 안방에 없어야 할 것을 가지고 나온다.
단순한 원칙인데 집이 덜 어질러진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어라'던 어른들 말씀이 명언이다. 물건의 자리가 정해져 있으면 새 물건을 들일 때도 그 녀석 자리를 만들어 줘야 하니 충동구매도 막는다.
물건의 자리는 대강의 구역으로 정하면 편하다. 거실장 왼쪽 서랍은 비상약 등 의료 관련 용품들, 가운데 서랍은 하루에 한 번은 열 만큼 자주 쓰는 것들(문구류, 건전지, 손톱깎이, 물티슈), 맨 오른쪽 서랍은 보조배터리나 무선키보드 등 컴퓨터/모바일 용품 존이다. 큰 서랍 안에 자잘한 물건이 함께 들어 있으니 가급적 한눈에 보이도록 자주 정리한다.
반려견의 물건은 반려견의 집 주변에, 원예용품은 화분들 주변에 모아두어 그 자리에서 해결한다.
실온보관 식료품은 주방 키큰장 맨 아랫서랍 하나를 정하고 거기 들어갈 만큼만 채우니 돈과 물자 낭비가 적다. 유통기한이 긴 통조림이라도 그 서랍 안에 누울 자리가 없으면 더 사지 않는다.
여기 자리가 없으면 사지 않기
편평한 바닥면에는 아무것도 없게
미니멀 지침서마다 공통으로 강조하는 원칙이 '바닥면에는 물건 두지 않기'다. 실천하기가 은근히 어렵지만 효과는 꽤 좋다.
보조 식탁이든 메인 식탁이든 이것저것 올려놓기 딱 좋다. 그러나 뭔가가 올려진 모습과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모습은 천지차이다. 식탁에서 볼일을 마치면 싹 치운다.
빈 식탁은 맥주 한 캔을 들고 앉기에 여간 아름답지 않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원두 그라인더와 커피 머신이 있고 없고의 차이
거실장 위나 화장대 위 평면도 물건들이 앉고 싶어 죽는 공간이다. 비록 '쑤셔 넣기 수납'이라도 일단 표면에 아무것도 없으면 위안이 된다.
게다가 수납공간이 한정돼 있으면 물건의 증식을 막을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화장대 위와 인구밀도 높은 화장대 서랍
5분 안에 할 수 있는 일은 당장 하기
'나에게 5분의 여유가 있고 내 앞에 5분 내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당장 하라'는 말을 실천한다.
그릇이 나올 때마다 설거지를 하면 결국 나는 하루종일 설거지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설거지감을 모았다 한 번에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개씩 열 번을 하나, 열 개를 한 번에 하나 조삼모사다. 그 후로는 주방이 깨끗한 상태를 택했다.
건전지를 꺼내다 서랍이 어지러우면 그 자리에서 정리한다. 한 번에 많은 것을 정리하려는 대신 5분 내에 끝나는 초간단 정리를 자주 한다.
책장 한 칸에 있는 책들의 키 맞추기, 욕실 수납장 안에서 안 쓰고 재워두는 물건 버리기, 냉장고 도어포켓 한 켠에 모아 둔 소스류 체크하고 버리기 등등 집안에는 5분 안팎의 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미션들이 널렸다.
덥썩 새로 사기 전에 빌리거나 대체하거나
읽고 싶은 책은 도서관을 이용하고 정말 소장하고 싶으면 중고 서점에서 먼저 찾아본다. 중고 서점은 절판된 책도 구할 수 있어 좋다.
공립 도서관끼리는 상호대차 서비스도 잘 돼 있어서 같은 관내에 있다면 멀리 있는 도서관의 책도 온라인으로 신청해서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서 빌리고 반납한다.
이번 주에는 베스트셀러로 소문이 나서 궁금했던 소설과 오랜 기간 강력계 형사였던 여성의 에세이 그리고 갱년기를 대비하며 읽고 싶은 의학 관련 도서들을 상호대차로 빌려 읽었다.
책은 집에 한번 들이기는 쉬워도 내치기 어려운 품목이다. 요즘은 책값도 만만치 않은데 책을 사서 다 읽는다는 보장도 없고 우리 집의 공간을 주며 데리고 살 만큼 만족하지 못하기도 한다.
정말정말 갖고 싶은 책을 산다. 그러면 그게 소설이든 역사서든 두고두고 여러 번 읽게 된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휴대폰부터 들지 말고 대체할 만한 것이 있나 찾아본다. 집을 뒤지면 비슷한 물건이 나오기도 한다.
받침이 없어 물이 밑으로 새는 화분에는 상처 난 접시를 받쳤다. 다이소에서 천 원이래도, 안 사고 대체하면 천 원 이상의 효과가 있다.
커피 캡슐이 들어있던 틴케이스는 그대로 캡슐 보관통으로 쓴다. 버리기 아까운 샐러드 용기는 몽당 채소를 모아 냉장고 서랍 안에 두고 더 활용한다.
플라스틱이나 철제 등 재활용 용기의 재질에 따라 어느 정도 더 쓰다가 버린다.
버리기 아까운 상태의 포장용기는 좀더 사용하기
목을 조이지 않는 생활 습관이 오래간다.
운동도 매일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보다 일주일에 딱 세 번만 가자고 생각하면 실천도 쉽고 미션 클리어 후의 만족감도 충만하다.
다른 집을 보지 말고 우리 집 상황을 1순위로 고려하여 미니멀을 시도한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집은 2인 가구인 우리 집보다 더 넉넉한 식료품 팬트리를 마련해야 한다. 메이크업이 기쁨인 사람의 화장대는 맥시멀이어도 된다. 오래됐거나 거의 다 쓴 제품, 잘 안 쓰는 제품만 잘 버리고 정리하면 된다.
미니멀, 정리하기, 버리기는 불문율이 아니니까 스스로 내키지 않는데 정리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주변이 멀끔해지면 좋은 효과들이 덩달아 생겨난다.
같은 공간도 더 넓고 쾌적해지고 공간과 나에게 생기가 솟는다.
물렁한 미니멀을 권한다. 버리기가 집착이 되지 않고 정리하기가 불편이 되지 않는 설렁설렁한 날들을 보내다 보면 나의 미니멀도 점점 단단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