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냉장고를 바꿀 때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다. 내가 다시 2인가구가 된다는 점이다.
신혼살림으로 처음 샀던 500리터 2도어 냉장고 이후의 냉장고들은 전부 양문형의 큰 냉장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이 태어나고 커가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번 냉장고를 살 때도 도어 디자인과 구조만 고민했지 앞으로의 나에게도 과연 대형 냉장고가 필요할까 하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나의 냉장고는 160센티가 못 되는 내 키로는 맨 위칸 안쪽까지 손이 닿지도 않아 길쭉한 수납 트레이를 놓고 트레이를 통째로 꺼내가며 필요한 것을 찾아야 한다.
게다가 초겨울에 김장을 넉넉히 해서 일 년 내내 보관하며 한 통씩을 꺼내 먹는 우리나라 음식문화의 특성상 김치냉장고를 같이 쓴다는 점을 간과했다.
큰 냉장고를 산 지 몇 달 후에 스탠드형 김치냉장고를 샀다. 그전까지는 15년도 더 된 테이블형 김치냉장고를 발코니에 놓고 썼었다. 김장김치를 보관할 때는 문을 자주 여닫지 않고 일정한 온도와 환경에서 가만히 둬야 하므로 김치냉장고를 따로 쓰는 것이 좋다.
현재 우리 집의 870리터짜리 냉장고는 반도 안 차 있고 오히려 그 옆에 놓은 327리터 김치냉장고 공간의 70퍼센트 정도를 사용 중이다. 고춧가루나 장류, 과일 등 저장성이 있는 것은 김치냉장고 보관이 낫다.
우리 부부 같이 성인 자녀와 따로 사는 2인 가구는 각각 400리터 안쪽의 2도어 냉장고와 김치냉장고를 나란히 놓고 쓰는 게 적당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렇게 구성했다면 가전제품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고 주방 면적도 보다 넓게 쓰고 전기요금 절약까지 1석3조였을 것이다.
둘이서 하루에 한두 끼만 해 먹는 중년 부부에게 대형 냉장고는 과하다.
록밴드 리더인 아버지와 고등학생 아들 2인 가구가 사는 집의 주방을 영화에서 보고 '아, 이거다' 했다.
각을 맞춘 최신 시스템키친 대신 작고 튼튼한 냉장고가 있었다. 2인가구의 몸집에 딱 좋은 냉장고였다.
상냉장 하냉동 400리터 정도로 보이는 2도어 냉장고
작지만 필요한 재료가 정돈된 냉장고로부터 두 칸의 싱크대, 조리대, 화구로 이어지는 ㄱ자 싱크대 앞에 추가로 일자의 정리공간이 있어 위에서 보면 ㄷ자 형태의 주방이다.
아파트로는 20평대 초반의 주방 정도 되는 사이즈 같다.
저렇게 아담한 냉장고 옆에 똑같은 모양의 김치냉장고만 하나 나란히, 대한민국 노부부에겐 이 정도면 됐다.
영화 속의 주방, 맨 오른쪽이 냉장고
도시를 떠난 주인공이 시골집에서 혼자서 사계절을 즐기며 음식을 해 먹는 영화의 한국 버전에 나오는 주방에도 작은 냉장고가 보인다. 이건 좀 작은데 싶겠지만 시골집이니 김장김치는 항아리째 마당 한편에 묻을 수도 있겠고 혼자 사는 살림이나 간소한 살림엔 괜찮을 것이다.
물론 나는 마당 가진 집에 산다고 해도 땅을 파는 대신 김치냉장고를 쓰고 싶지만 말이다.
한옥의 주방이 주는 한갓짐
전반적으로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 냉장고들이 확실히 크다.
우리나라에 사는 아들을 보러 온 북유럽의 어머니가 거대한 양문형 냉장고를 보고 감탄하던 장면을 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냉장고, 냉동고에 저장하기를 좋아하는 편인가.
현실 맥시멀리스트이신 시어머니 댁에 가면 크고 작은 냉장고 두 개, 김치냉장고 두 개, 조그만 전용 냉동고도 하나가 있다. 그 냉장고마다 음식과 식재료가 가득가득해서 장 본 것을 새로 넣으려면 초만원 지하철에 들어서는 것처럼 쑤셔 넣어야 한다.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가 뭔가가 바닥에 뚝 떨어져 놀라는 일도 다반사다.
외국생활을 오래 한 C 언니는 해외에서 쓰던 냉장고를 가져와 그대로 썼는데 아담하고 튼튼했다. 우리나라 신혼부부들이 많이 사는 냉장고보다도 한참 작았지만 5인가족 살림에 충분하다고 했다. 보통 주부들보다 집에서 손님맞이 요리와 베이킹을 많이 하는 언니조차 작은 냉장고를 잘 활용하는데 나 같은 반쪽이 주부가 냉장고만 컸던 것이다.
마치, 닉네임은 백두대간 어쩌고 거창하면서 맨날 죽어나가 아군에게 소생을 구하는 전쟁게임 유저 짝이라고나 할까.
나는 구입한 지 겨우 2년 된 냉장고 앞에서 다음번 주방을 그려본다.
다음번 냉장고는 문을 열면 친절하게 자기 내부를 한눈에 보여주고 내가 까치발만 하면 맨 위칸 깊은 구석까지 깨끗이 닦아낼 수 있는 적당한 키를 가진 놈으로 골라야지.
낮에는 전등을 켜지 않아도 훤한 해가 들고 전기 후드를 켜지 않아도 창문으로 드나드는 바람에 환기가 되는 주방을 갖고 싶다.
그런 집의 따뜻한 나뭇결이 느껴지는 싱크대에서 각자 먹고 싶은 것을 해 먹거나 남편이 해 준 요리를 즐기는 시간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앵글을 아래로 조금 내리면 착한 금빛 털을 가진 리트리버 한 마리가 꼬리를 치며 우리를 바라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