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딸이 우리 부부를 찍은 사진을 보고 흠칫 놀랐다. 웬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것이었다. 남편이나 나나 턱이 혼자면 외로울까봐 그랬는지 쌍겹의 투 턱을 하고 두피 쪽 머리칼은 희끗희끗해서 숱이 빈 것처럼 보이고 뺨에는 50년 중력에 투항한 살들이 늘어져 있었다.
사진을 다운 받지 않고 얼른 닫았다.
사진에 찍히는 내 모습은 어떻게 이렇게 매달 새롭게 늙을 수가 있을까.
잘 나온 사진을 살짝 보정했으니 프사에 올리라고 한다. 잘 나왔다면서 왜 보정하는데.
사진 하나 바꾸겠다고 공들여 주름 지우고 화장을 그려 넣고 턱을 깎아야겠나 싶다. 알 사람은 익히 다 아는 얼굴이다.
시들어가는 몸을 자세히 보지 말고 아직은 젊다는 착각 속에 잘 살라고 노안도 같이 오는가 보다. 바로 옆에 놓인 휴대폰에 알림 메시지가 떠도 내용이 안 보인다. 그닥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이제 '천천히 보고 천천히 대응해도 되는 나이'라는 신의 뜻이다.
때로는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게 더 좋은 일이기도 하다.
나는 여성전용 운동클럽에 다닌다. 근력운동 기구와 유산소운동존이 큰 원을 이루며 마주 보고 번갈아 배치돼 있는데 클럽에서 권장하는 기본 두 바퀴를 돌고 스트레칭을 마치면 보통 40분 내로 그날의 운동이 끝난다. 운동 강도가 탄력적이고 중장년 이후 여성들에게 부담이 적으면서 필요한 운동들로 짜여 있어서 보통 헬스클럽에 비해 나이 든 여성이 많은 편이다.
같은 운동을 할 때도 나이대에 따라 스피드와 모션이 다르다. 예를 들어, 만세 자세에서 한 팔을 내리는 동시에 반대쪽 다리를 접어 올려 손으로 발을 치고 다시 올리는 동작을 보자. 2,30대 여성들은 깡충깡충 뛰면서양쪽 다 내렸다 올렸다 하는 데 1초 걸린다. 4,50대는 뛰지는 않고 한쪽 팔과 다리를 내리고 올리는 데 1초씩 걸린다. 60대 이상 선배들은 일단 두 팔부터 일자가 아닌 둥그런 만세 상태로 시작하고 한 팔이 내려왔다 원위치 하는 데에 2초씩은 걸린다.
그렇지만 제일 열심히 운동하는 건 대선배들이다. 운동복을 비장하게 입고 흰 양말도 단단히 올려 신고 가끔은 손가락장갑도 낀다.
그분들은 나를 보며 '아직 젊어 좋아'라 말한다.
나도요
친구들을 만나면 약 먹고 병원 다니는 얘기, 건너 건너 또 건너 어느 집 남편이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얘기, 결국은 요양원에 모신 부모님 이야기가 많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우리의 수다 목록에 없던 화제들이다.
그러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다들 폰을 멀찍이 들고 눈을 가늘게 뜨고 본다. 안경을 쓴 친구들은 안경을 올리고 본다. 술자리에서 나는 안 마신 채 술 취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처럼 웃기다.
나도 매일 먹는 약이 한 알 있는데 두 알, 세 알로 늘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큰 병을 힘겹게 이겨내거나 관리 중인 친구들을 보면 이런 자질구레한 퇴행성 증상은 감사할 수준이지만 나도 곧 그러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러니 굳이 더 젊고 건강한 친구들을 보며 한탄할 필요도 없다.
어느 노래가사대로 '순서가 다른 것뿐'이다.
누구나 여유로운 중년을 원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러울 만큼 많은 돈이 있는데도 그 돈으로 인해 불행한 사람이 있고, 물질적으로 허덕여도 내 삶은 불행하지 않다는 사람이 있다.
중년 이후를 어떻게 잘 보내느냐의 문제에서 경제력은 1순위가 아닌 것이다. 젊음을 잃어가는 대신 깡충깡충 뛰는 나이에는 깨닫지 못하는, 중년의 선 굵은 인사이트를 모으며 살면 된다.
우리 인생의 중년기는 노래 한 곡의 간주 타임이나 농구 경기의 하프 타임 같다.
가수가 설령 앞부분 노래를 개망했어도 간주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고 아직 못 보여준 능력을 끌어내서 뒷부분만 잘 부른다면 절반은 성공하고 박수와 환호를 받는다.
농구 경기를 보면 후반전 3,4쿼터에 무수한 역전과 반전이 일어나서 게임 결과가 뒤바뀐다.
이렇듯 간주 타임과 하프 타임은 또 한 번의 기회다.
나는 날마다 나를 더 좋아하며 살겠다.
지나간 일을 그리워하는 대신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대하며 살겠다.
하루가 바쁘지 않으니 길을 일부러 돌아가며 새로운 것을 더 많이 볼 테다.
이제까지 며느리, 아내, 엄마로서 당연히 하던 일도 내가 하기 싫으면 적당히 안 하며 살 자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