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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빈대디 Dec 21. 2022

눈 오는 날 아침의 흑백사진

눈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고 싶다



눈이 내리고 있다.

아침 해가 채 뜨기도 전에 함박눈이 소복이 소복이 내리고 있다.


눈은 세월을 피해 가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그대로다.


어린 시절부터 눈은 반가운 손님이었다.

눈이 내리는 날 이면, 눈을 뜨자마자 내복차림 그대로 마당으로 뛰어나가 손꼽아 기다리던 눈을 확인한다. 두 눈을 반짝이며 눈과 눈인사를 먼저 하고, 손을 길게 내밀어 눈과 맨손악수를 나눈 다음, 입을 하마처럼 벌려 혓바닥 위로 눈 몇 송이 내리게 하여 눈 고물 맛을 보고 나면, 새벽부터 기다리던 아침 눈과의 아침 인사가 끝난다.


그리고 나는 바빠진다.

후다닥 방으로 들어 가 본격적으로 눈을 만날 준비를 시작한다. 무릎 나온 내복을 입은 채로 두꺼운 누비바지를 껴입고, 위에는 털스웨터를 입은 후 거기에 두꺼운 외투를 겹쳐 입는다. 거기에 빵모자를 깊숙이 덮어쓰고 마루로 나가서 난간에 걸터앉아 털신을 신고, 털실 벙어리장갑까지 끼고 나면, 나의 눈놀이 차림새가 완성된다.


집 뒤뜰 아무 데나 놓여있던 비닐포대 하나를 찾아들고 동네에서 가장 경사가 길게 진 언덕길을 향해 숨이 막히게 뛰어간다.


새하얀 색의 언덕에는 벌써 동네 친구들이 도착해서 미끄럼 시합을 시작하고 있다. 나도 출발선에 끼어들어 친구들의 뒤를 따라 비닐 썰매를 타고 최고 속도를 내어 언덕을 신나게 내려간다.


온몸이 눈범벅이 되고 속옷은 땀으로 축축해질 때쯤이면 손은 시리고 발은 아려온다. 손을 입으로 호호 불어보기도 하고 발을 동동 굴려도 보지만 이미 작은 손과 발에 찾아든 동장군의 심술은 어찌하지 못한다.


그래도 눈언덕에다 어른들이 연탄재를 뿌리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미끄럼을 타야 한다. 다시 오르고 신나게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리던 장갑 속 손끝도 아려오던 털신 속 발가락도 다 잊어버리고 그냥 언덕을 오르고 내린다.


해가 머리 위에 올라올 때쯤이면 여기저기서 엄마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누구야 밥 먹어라'하며 아이들을 찾는 엄마들의 외침들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잊었던 시장기가 몰려온다. 미끄럼을 타던 친구들은 모두 각자의 집으로 뛰어서 돌아간다.


북적이던 눈언덕에는 이제 고요만 남는다.

이렇게 눈 오는 날 아침은 지나간다.


세월은 흘러 지나가고 친구들은 자기의 길을 찾아 흩어져 갔지만, 오늘처럼 눈 내리는 아침길은 변함없이 기분이 좋다.


오늘같이 눈이 내리는 날엔,

왠지 가슴 한 편에 설렘이 자리한다.

오늘처럼 함박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아침엔,

하얀 눈을 밟으며 뽀드득 소리를 만들고 싶다.


오늘은 지하철을 발아래다 두고

그냥 눈길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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