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외로미 Jun 01. 2020

하나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필리핀에서 두 달 살기-세 번째 이야기

지금 머물고 있는 곳에는 어학원이 그렇게 많지 않다. 이동을 위해서 차가 필수적인데 형부의 출퇴근 시간, 조카의 학원 시간을 제외하고 차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 먼 곳은 다닐 수가 없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조카가 다니는 학원에 등록하기로 했다. 초등학생들이 많이 다녀서 너무 수준이 낮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성인 전담 선생님도 있다고 한다.


정말 오랜만에 해 보는 레벨 테스트! 정식으로 영어학원을 다닌 게 약 8년 만이다. 보고 듣고 읽는 것은 종종 했으나 입 밖에 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묘하게 떨렸다. 레벨 테스트 동안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코로나에 대해 이야기했고(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영어를 공부하게 된 것도 필리핀에 머물게 된 것도 코로나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실직에 대한 한탄도 함께 했다. 대충 말로 때우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종이를 슥...... 지금까지 아이스 브레이킹이었고 단어, 문법, 읽기, 쓰기 등이 골고루 담겨 있는 평가지였다. 당황스럽지만 머리를 쥐어짜 내며 답을 적었고 결과는 애증의 'intermediate'


사실 나의 영어 실력에 대한 슬픈 전설이 있다. 대학 시절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가기 전에 정말 한국에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고 갔다. 호주 어학원에서 처음 받은 등급도 'intermediate'.

그때 9시부터 3시까지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 잠시 쉰 후에 4시부터 10시까지 일을 했다. 돌아와서 숙제도 하고 다음 날 싸갈 도시락을 만드는 등 집안일을 한 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영어로 일기 쓰기였다. 정말 아무리 피곤해도 술에 취해도 영어 일기는 꼭 쓰고 잤다.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호주에서 마지막으로 'upper intermediate'. 쉽게 말하자면 1년 동안 고작 한 두 단계 정도밖에 올라가지 못한 것이다. 난 평생 'intermediate'일 거라며 속상해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intermediate'구나!


아픈 기억이지만 호주에서의 생활이 참 좋았다.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이유를 생각해 보니 그때 한국에 있다면 신경 써야 할 학점, 인간관계, 진로 등에서 벗어나 오직 영어만 신경 쓰면 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필리핀에서의 생활은 더 편해졌다. 그때처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되고 집안일이 아주 없진 않지만 가끔 도우미가 오고 언니와 나눠서 하면 그렇게 힘들지도 않다. 무엇보다 당장 취업을  위해서 만들어야 하는 점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딱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외에도 감사한 일이 정말 많다. 한국에서는 항상 마스크를 써야 해서 답답했는데  마스크를 쓰지 않고 거리를 거닐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조금 덥지만 미세먼지가 없는 깨끗한 하늘을 볼 수 있고 흐린 날도 거의 없어 최소한 날씨 때문에 우울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가 한화로 3천 원도 되지 않아서 테라스에 앉아서 책을 보거나 숙제를 하기도 좋다. 한국에선 쉽게 누릴 수 없는 소소한 일상을 마음껏 누리고  생각이다.





이전 02화 필리핀에서 하면 가장 좋은 것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