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에서 학생으로, 늦깎이 어학연수
#필리핀에서 두 달 살기! - 네 번째 이야기
필리핀은 어학연수로 인기가 많은 나라이다. 한국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고 물가도 상당히 저렴하기 때문이다. 방학 때 단기 연수를 오기도 하고 보통 영국이나 미국에서 연수하기 전에 이곳에서 공부를 하기도 한다. 실제로 호주에 있을 때도 필리핀에서 공부하다가 온 사람도 많이 봤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공부하기 전에 다른 나라와 다르게 특유의 억양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했는데 실제로 만난 선생님들의 발음이나 억양이 특별히 이상하지 않았다. 특별한 목적이 없는 어학연수이지만 대충대충 할 생각은 없었다. 특히 나도 언어를 가르치는 입장이다 보니 가르치는 방식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첫 번째 선생님은 남자 선생님이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이름은 적지 않으려고 한다.) 보통 교재에 있는 지시문과 지문을 나에게 읽으라고 하고 읽을 때 발음 정도만 체크해 주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문법 설명도 책에 있는 설명을 그대로 읽고 추가적인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다. 물론 수업 당일 책이 결정되어 선생님도 학생도 리뷰를 하지 못한 상태이긴 했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혹시 나도 학생들에게 그런 느낌을 주지 않았나 나의 수업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수업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한 번의 수업으로 평가하고 싶진 않았다. 서로 적응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카의 수업 시간을 조율하면서 나도 수업 시간을 바꾸게 되었고 바꾼 시간은 그 선생님이 일정이 안 되어 불가피하게 선생님을 교체하게 되었다. 이후 종종 학원에서 마주치면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지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했다.
첫 수업이 끝나고 느낀 점은 당연한 것이지만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도 선생님도 준비가 안 되면 무의미한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하루에 1시간밖에 안 되는 수업이지만 수업 전후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공부했다. 내가 선택한 교재는 온라인으로 셀프 스터디가 가능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문법이나 단어도 복습하기에 아주 좋았다. 책에 있는 것 외에도 추가적인 질문에 대한 답도 써 보고 책에 있는 쓰기도 미리 써 갔다. 말하기 주제도 한 번 읽어 보고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할지 생각해 봤다. 정말 꽉 채운 시간들이었다.
새로 바뀐 선생님도 '오늘도 정말 열심히 공부했구나'라고 독려하면서 정성껏 피드백을 해 주었다. 사실 나도 선생님이지만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학생은 조금 부담스럽다. 예를 들면 수업 시간이 아닌 주말이나 밤늦은 시간에 질문을 해 오면 살짝 피로함을 느꼈다. 물론 난 그녀의 개인적인 연락처를 모르기에 그런 무례함을 범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다. 특히 학생이 문제를 풀거나 교재 지문을 읽을 때 선생님이 잠시 쉴 수 있는데 빈틈없는 수업에 그녀도 쉴 틈이 없었을 것 같다.
그녀는 내가 자주 하는 실수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스킵하고 싶은 부분이나 집에서 하고 싶은 것은 언제든 이야기하라고 했다. 즉흥적인 질문도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많은 부분을 하루에 끝낼 수 있었고 이런 속도라면 책에 있는 모든 단원을 끝내고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 이후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오랜만에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단순히 수업만 듣는 게 아니라 수업 시간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생각도 하게 해 주는 것 같다. 남은 시간도 꾸준히 알차게 보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