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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Nov 24. 2020

빨간머리 앤: 신부는 되고 싶은데 아내는 되기 싫어요

결혼식과 결혼에 대한 생각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어쩜 그리 대사를 잘 만들었는지 이번에도 놓칠 새라 정신없이 받아 적은 문장들이 있다. 지난번에도 빨간머리앤 관련 글을 썼지만 보면 볼수록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감했던 글을 몇 가지 더 이곳에 공유하고 싶다.  


신부는 되고 싶은데, 왠지 아내는 되기 싫다고 말하던 앤은 친구의 언니가 이른 나이에 선생님과 결혼을 하기로 하고서는 결혼식날 뛰쳐나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는 매튜 아저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I think I need to re-imagine the whole marriage/wedding thing. 

It isn’t about just one brief, shining moment in white, or saying I do.

And I’m not gonna give myself over to someone and be a prettyish piece of property without voice or ambition. 


결혼과 결혼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흰 드레스를 입고 ‘네’라고 답하는 빛나는 한 순간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목소리도 야망도 없는 예쁜 소유물이 되진 않겠어요. 



생각해보면 그랬다. 어릴 적 읽었던 수많은 동화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서 멋진 왕자와 입맞춤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산다고 했다. 책이 끝난 뒤로 얼마나 어떻게 해서 잘 살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마치 결혼식이 인생 목표인 양 그렇게 그것을 성취하고서 끝이 났다. 눈부시게 예쁜 신부의 모습과 생활 속 고된 아줌마의 모습이 같은 인물일 것이라고는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외면하고 싶고 믿고 싶지 않다. 아마도 나의 결혼 생활은 보통보다는 아름다우리라, 더 밝고 예쁜 모습 이리라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을 뿐, 그것에 대해 앤처럼 이렇게 다부지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단지 결혼을 하면서도 뭔가 본능적으로 꺼림칙했을 뿐이었다.    



We will be equals and partners, not just husband and wife. 

And neither one should have to abandon their heart’s desire. 

I’ve come up with a new name for both parties, together, because I believe, that they should be named the same. 

(Matthew: Oh, let’s hear it.) 

Life mate. 

Instead of a marriage, I shall call it a love bondAnd any two people can have one. 


남편과 아내가 아닌 동등한 동반자가 될래요. 둘 중 누구도 꿈을 버릴 필요가 없죠. 양쪽을 부르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냈어요. 서로 같은 단어로 불리도록요. 

(매튜 아저씨 : 그래? 어디 한번 들어보자. )

인생의 반려자요.

‘결혼’ 말고 ‘사랑의 유대’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명이든 그럴게 될 수 있.



솔직히 결혼식을 할 때, 검은 머리가 파뿌리처럼 하얗게 변하더라도 영원히 지금처럼 사랑하게 될 거라고 100% 확신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한 80% 정도 있었다고 해야 할까. 다만,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인생의 반려자로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면, 남녀 간의 애정 이상으로 더 끈끈하고 굳건한 관계가 나머지 20% 이상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나에게 결혼이란 그런 것이었다. 꺼림칙한 사랑의 맹세 이상으로 마치 밀가루와 물이 만나 반죽되고 부풀어올라 멋진 빵이 되듯이 서로에게 정신적인 인생 반려자가 되기를 바랐다. 한국의 결혼 제도, 가부장적인 시댁 문화 등에 어쩔 수 없이 편승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적어도 부부간에는, 우리 둘 사이는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결혼하고 머지않아서 그것이 나만의 오산이었음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앤의 말대로 부부를 ‘Life mate (인생 친구, 인생의 반려자)’의 개념으로 본다면, 남녀가 살면서 서로 얼마든지 윈윈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싸울 지라도 흰머리가 늘어나는 만큼 함께 늙어가며 토닥여주며 커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 생각만 해도 얼마나 멋진가. 더군다나 앤이 마지막에 ‘any two people can have one’이라고 한 말은 좀 더 의미심장하다, 결혼이 반드시 남녀 간의 결혼만을 의미하지 않아도 되는 좀 더 포괄적인 관계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Life mate 가 남녀가 아니라 남남이건 여여이건, 누군가가 인생을 관통하며 힘을 얻어갈 평생의 동지를 만났다는데 그렇게 죽자고 반대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심플한 생각과 표현이 결국에는 넓은 범위의 ‘평등’을 아우를 수 있다니 참 멋진 것 같다. 지금의 젊은 세대, 그리고 우리의 다음 세대에서는 남편, 아내라는 호칭보다 서로를 ‘인생 친구 (Life mate)’ 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따듯한 관계로 불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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