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역시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여기저기 떠날 거라고 발설하고 나니, 어느샌가 이 여행이 그저 구태의연한 관광이 되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점점 커졌다. 내심 속으로, 이 나이 먹고서 그저 시간과 돈만 탕진하고 아무런 실질적 소득 없이 돌아오는, 현실 도피성 여행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여행에 임하는 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려 하니 욕심이 점점 커져갔다. 뭔가 특별한 형태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과 압박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독특한 콘텐츠로 인스타그램을 키워보고 싶은 욕망이 생겨 이리저리 레퍼런스가 될 만한 계정들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런, 이런... 이리도 앞 뒤 다른 인간이 어디 있나. 이건 일종의 병이다. 좀 더 특별한 여정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으로 이런저런 묘수를 찾다 보니, 어느덧 고민의 범위는 점점 커져가고, 이 여행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간다. 계획에 좀처럼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민에는 중력이 있는 것 같다. 한 번 무거워진 고민에는 엄청난 중력이 생겨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나는 그 어느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행지를 선정하는 것도, 동선을 짜는 것도, 어떤 컨셉의 여행을 해야 할지도, 다시 모든 게 미궁 속에 빠져버렸다.
'야, 이구름. 이거 네가 바라던 모습 맞아?'
내 자신에게 일침을 날린다. 그리고 며칠간 별다른 진전 없이 인터넷 창에 한가득 펼쳐놨던 수십 개의 여행 블로그, 도시별 후기, 여행 유튜브 등 정보로 가득 찬 화면들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그리고 내가 왜 떠나려고 했는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솔직히 그냥 세상 사람들 사는 이야기가 궁금했다.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고 살아왔는데, 문득 인생은 참 짧고 내가 몸 담고 있는 세계가 너무나 좁다는 걸 느꼈다. 내가 그동안 알고 경험해 온 세계는 고작 이 한국이라는 작은 땅덩어리가 전부였다. 아무리 지구촌 세상으로 전 세계가 가까워졌어도,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정답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 땅의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의 산물일 뿐이라는 걸 어느 날 깨달았다.
우연히 독일의 FKK(나체주의 문화)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FKK는 "우리 몸에 진정한 자유를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의 문화다. 몸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 성적인 접근이 아닌, 인간의 몸을 자연스럽고 평등하게 대하는 접근을 강조한다. 신체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억압을 제거하고, 신체를 보다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런 문화적 흐름에서 혼욕 사우나, 누드 비치 등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누드 비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도, 그게 어떤 맥락 속에서 싹튼 것인지 몰랐을뿐더러 솔직히 크게 관심도 없었다. FKK에 대해 알고 난 이후에, 친한 지인 분이 대학시절 이탈리아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할 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홈스테이 했던 가정에서 다 큰 성인 가족끼리서 누드 비치에서 놀다 오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더라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아 나의 세상은 얼마나 좁은가 새삼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신체'에 대해 갖고 있던 관념들이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미디어의 압박에 의한 산물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열린 사고를 지향하는 성인이더라도, 어쩔 수 없이 깊게 뿌리 박힌 유교 문화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왔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내 몸은 가리고 지켜야 하는 것이며, 여자로서 항상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라고 배웠다. 그런게 알게 모르게 내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줬던 것 같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신체는 대개 성적인 것과 결부되어 상품화되어 왔다. 미디어에서는 이상적인 몸매나 외모를 직간접적으로 강조한다. 주로 여성의 신체는 성적 대상화의 측면에서 해석되고, 남성의 신체는 힘과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여기에는 물론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론적 관점도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그런 모든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성적 또는 권력적 해석을 다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서의 신체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 나로서는 너무나 새로운 접근이었다. 이것에 대한 어떤 개인적인 견해를 떠나서, 또 FKK가 모든 유럽인들을 대변하는 문화는 아니라는 것을 떠나서, 이렇게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어떤 토양에서 자라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이 새삼 너무도 신기했다. 이는 그 다름이라는 것의 아주 작은 단면에 불과하겠지.
반쪽짜리 한반도에서 나고 자라, 이곳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이 만든 세상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이 세계의 유일한 정답인 것처럼 살아왔던 것 같다. '정답'이라는 것을 한국 땅을 벗어나면 찾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정답이 없다는 게 유일한 정답이겠지. 다만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내 세상을 넓히고, 낯선 곳에 놓였을 때 나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서도 더 알아가고 싶었다. 단지 명소를 보고, 사진을 찍고, 유명한 지역의 음식을 맛보는 것은 사실 관심 밖의 일이었다. 서울 바깥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한 것이지, 어느 나라에 가서 무얼 보느냐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솔직히 어디든 상관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느 도시를 여행할지를 정하는 게 더 어려웠는데, 막연히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흥미를 시작으로, 나는 그동안 살면서 한 번도 관심 가져 보지 않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이 여정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3월에, 유럽 반도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따뜻한 날씨를 경험할 수 있다기에 마음에 들었다. 음, 선택의 이유가 단순하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앞으로 내려야 할 선택이 수십 수백가지는 더 될 텐데, 단순하게 생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십 대 초반, 똑같은 유럽 땅을 여행했던 그때의 나와는 여행에서 기대하는 것들이 많이 달라졌다.
여행의 목적을 다시 되새기면서, 100% 정해진 계획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이 여정에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요 도시와 머무를 기간만 대략적으로 정하기로 했다. 하루에 1~2개의 중요한 활동만 계획하고, 나머지는 그곳에서 즉흥적으로 결정하려고 한다. 유명한 명소 대신 그냥 골목을 걸어 다니며 현지의 일상을 주로 관찰하고 싶다. 현지인들과 인간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현지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에 참여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커뮤니티 모임, 러닝 크루, 크로스핏 박스 워크인, 지역 내 작은 봉사활동, 혹은 워크숍 등 다양한 그 지역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최대한 뛰어는 게 내 계획이다. (보아라.. 이게 바로 P식 계획이다..) 그렇게 길 위에서 만난 전 세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 그들은 어떤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지, 그들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무엇인지, 그들이 경험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런 것들을 묻고 싶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나누어주었을 때, 나는 그럼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내가 사진을 잘 찍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요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유명인사도 아니고, 뭔가 줄 수 있는 특출 난 게 없어서 여러 가지 고민이 되었는데 이건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래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많은 게 간명해졌다. 다시 한 번 이제부터 모든 걸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하고, 가볍고 신속하게 결정하자고 마음먹는다. 결정을 미루는 것도 습관이라는 걸 문득 깨달은 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소설 제목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우연히 이 책을 추천하는 글을 보고, 조만간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왠지 이 책이 아주 마음에 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아직 읽기도 전에, 나도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미래의 내가 그걸 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스페인으로 in 하여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은 계속된다.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중에 어디로 in 할지 정해야 했다. 여기서 또 고민이 되었는데, 동선상 바르셀로나 -> 마드리드 -> 리스본 순서로 점점 내려가면 되어서, 이 고민은 간단히 넘어갈 수 있었다. 자, 그럼 바르셀로나행 비행기 표를 사야겠다. 몇 주간 꿈쩍도 못하던 결단 세포가 드디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의사결정에 속도가 붙었다. 편도행으로 바르셀로나행 티켓을 검색하자, 직항인데 35만 원짜리 티켓을 발견했다. 출발 시간도 괜찮고, 도착 시간도 괜찮고, 딱 3자리 남았다. 바로 결제했다. 몇 주를 헤매다가, 그렇게 비행기 표를 찾고 사는 데에는 10분이 채 안 걸렸다.
드디어 2025년 3월 7일, 나는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탄다. 입가에 참을 수 없는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이게 뭐라고! 드디어 내가 떠나는구나. 그 외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는 건 아직 없지만, 비행기표를 끊고 나니, 이 여행이 더 이상 내 상상 속의 허구가 아니라 곧 일어날 실제 상황이라는 것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씰룩거리는 입가를 주체하지 못한 채, 그렇게 이 여행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