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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88일간의 배낭여행 출국 2시간 전

바르셀로나행 탑승구 앞에 앉아 적어보는 떨리는 마음

by 이구름 Mar 07. 2025

Episode 8.

오지 않을 것 같은 날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아침 9시 30분, 탑승구 앞에 앉아 두 시간 남은 바르셀로나행 비행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겨울 친구랑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덜컥 하게 된 갑작스러운 세계 여행에 대한 결심을 한 지 3개월 만의 일이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배낭 여행객이라면 응당 ‘배낭’을 메야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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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내 몸통만 한 배낭을 둘러메고서, 엄마와 포옹을 나누고 집을 나섰다. 막연하기만 했던 그날의 그 작은 결심이 진짜 이렇게 눈앞의 현실이 되다니, 이제 와 새삼 어안이 벙벙하다. 긴장을 한 건지, 이 알 수 없는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어제부터 아니 며칠 전부터 미세하게 온몸의 기저에 약간의 떨림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던 것 같다. 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가물가물한 상태다. 사실 크게 걱정이 없는 느긋한 편의 성격이라, 뭔가를 준비하는 것에 대한 강박이나 불안은 크게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 우리 가족이 더 걱정과 안달이었다. 세 달이나 떠난다는 데 준비를 너무 졸속(?)으로 하는 거 아니냐며. 하하. 마냥 느긋할 줄만 알았던 나도, 떠나는 날인 오늘은 알람도 없이 새벽 4시 반부터 눈이 떠진 걸 보니, 나 홀로 처음으로, 세 달간 머나먼 타지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에 새삼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나 보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가장 비슷한 느낌을 곰곰이 떠올려보니, 시험장에 들어서기 전, 수능을 보기 전, 면접을 보기 전, 중요한 발표를 하기 전과 같이 뭔가를 오랜 시간 준비해 왔고, 평가를 받거나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오늘의 이 설렘과 긴장 그 사이 어딘가의 이 떨림을 새롭게 이름 붙여 기억하고 싶다. 준비와 평가와 상관없이, 나에게 펼쳐질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가슴 떨리는 설렘으로 기억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비로소 웃음이 나온다. 이 여행, 정말 시작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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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화와 역사가 깃든 토양에서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며, 그간 내가 알고 있던 세계에 갇히지 않고 더 넓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더 많은 것들을 배우기를 바란다. 이 여정 속에서 내 자신과, 내가 마주하는 수많은 타인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여유와 감사함을 느끼고 싶다. 떠나기 일주일 전, 엄마와 함께 강화도 보문사에 다녀왔다. 처음으로 따뜻함이 내려앉은 2월의 어느 날이었다. “건강, 행복, 낭만”을 촛불에 적어, 바닷바람을 맞으며 108배를 올리고 왔다. 모두의 응원과 걱정과 사랑에 힘입어, 내게 주어진 이 세 달간의 시간이 더없이 안전하고 의미 있는 여행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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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 몰두하면 자기가 작아지고,

자신을 넘어서면 자기가 넓어진다.


남과의 비교, 사회적 시선을 다소 지나치게 의식하며 사는 우리들에게, 요즘은 더더욱 자기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자신의 가슴속 깊은 욕망이 무엇인지 깊게 깊게 파고들도록 하는 질문들이 책에서, 방송에서 많이 주어지는 것 같다. 스물 하나, 그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깊게 깊게 물으며 심취해 왔던 것 같다. 대학시절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저를 교수님과 함께 읽는 내 인생 최고의 교양 수업을 들으며, 내 자신과 인간에 대한 깊은 고찰의 즐거움을 참 많이 누릴 수 있었다. 학기를 마치고, 그때 그 무렵 나의 삶에 대한 감상과 기쁨과 혼란, 모종의 확신이 뒤얽힌 감사 메일을 드렸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오래된 메일함에 묵혀진 그 메일을 다시 와서 꺼내보려니, 뭘 그리도 길게 적었는지 수치심에 차마 다 읽을 수가 없었다… 감사하게도 그 두서없는 나의 긴 잡상이 담긴 메일을 다 읽으시고 교수님께서 따뜻한 답변을 주셨다. 메일의 말미에 이런 말씀을 함께 남겨주셨다.


“(…) 말 그대로 각고의 노력을 즐겁게 누리기 기원하네,

힘든 뒤에 보람이 올 테니까.

자기에 몰두하면 자기가 작아지고, 자신을 넘어서면 자기가 넓어진다는 점.

무엇보다 몸과 마음의 건강도 잘 챙기기 바라고….“


2016년 2월 25일에 받았던 메일, 벌써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 이 회신을 처음 받았던 스물한 살, 나는 마지막에 주신 문장을 솔직히 말해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에 몰두하면 자기가 작아지고, 자신을 넘어서면 자기가 넓어진다라.. 외부의 목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에 몰두하라고만 배웠는데,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어려웠다. 그리고 이 문장은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지난 8년 간 문득문득 내 주위를 맴돌며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10년이나 가까이 지나, 많은 일들을 겪으며 이제야 비로소 교수님께서 주셨던 오랜 지혜가 담긴 그 말씀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한 20대의 여정을 지나왔는지 모르겠다.


오로지 내 안으로만 심취하여, 내 세계에 갇혀 좁아지거나 이기심의 늪에 빠져들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고, 내가 속한 이 드넓은 세상을 이해하며 함께하는 사람이고 싶다. 계속해서 안팎으로 넓고 깊어질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오랜 시간이 지나, 마음속 한 켠에 있던 따뜻한 교수님의 말씀을 다시 꺼내보며 이번 여행에서도 그러한 마음을 잊지 않는 내가 되고자 한다. 이제 비행 시간이 30분 남았다! 비행기 타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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