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저래도 아픈 건 마찬가지

길심씨네서(18일째)

by 전난희

서울에 왔다. 벌써 영암 월출산 아래 두고 온 것들이 그립다. 뭉게구름 몰려다니던 그 파란 하늘이, 뜨겁지만 투명한 그 햇빛이, 푸른 들판을 물들이던 그 붉은 노을이 그립다. 폭염에도 아침저녁으로 살짝 들어와 기분 좋게 잠을 재워주던 그 찬바람이 그립다. 높이 솟아 나를 내려다보며 그늘이 되어주고 소슬한 바람을 일으켜 나를 일렁이게 하던 그 소나무가 그립다. 밤이면 몇 포대는 따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별들이, 새벽이면 거실 끝까지 들어와 슬며시 잠을 깨우던 그 달님이 그립다.

aa.jpg


떠나올 때 찌르찌르 아프던 가슴의 통증이 점점 옅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시골에 계신 연로하신 두 분을 생각하면 늘 이래도 저래도 마음이 아프다. 오로지 땅을 파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부모님이라 더 그렇다. 20여 일 시골살이를 끝내고 떠나오는 날, 길심씨는 딸을 배웅하느라 고샅길에 굽은 허리로 가늘어진 두 다리를 끌어안고 앉아 손을 흔들었다. 차가 고샅길을 빠져나와도 어머니는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내 머릿속에 사진이 찍혔다. 삭제를 눌러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기도 하다. 계속 아프니까.


어머니가 서울에 왔다 떠나가도 내가 시골에서 떠나와도 마음이 짠하고 아픈 건 마찬가지다. 있을 때 잘 하지 못하고 마지막 돌아서는 그 이별의 순간을 겪고 나면 나는 여지없이 며칠씩 가슴 앓이를 한다. 매번 그러는 내가 싫어서 스스로 다독거리며 어떻게든 빨리 어머니와의 이별, 그 장면을 잊어버리려 노력한다. 그리곤 나는 다짐한다. 떠나와도, 떠나가도 여운이 남지 않게 하는 엄마가 되자고. 아프지도 않고 건강한 엄마가 되자고. 그 쓰라림을 아니까 내 자식들이 나 같은 아픔을 느끼지 않게 말이다. 이럴 때조차도 자식은 제 자식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오랫동안 함께 하다 떠나온 길이어서인지 운전하는 내내 가슴이 더 미어져 왔다. 차가 붕붕 떠오를 것처럼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눈물을 삼켰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는 것인지? 그것은 아마도 길심씨의 굽은 허리 때문일 것이다. 밭고랑에서

"농사만 안 지어도 허리가 덜 굽었을 것인데... 엄마, 이제 농사짓지 마!"

했더니

"내 직업이 그런디 어쩔 것이냐? 시골에서 살면서 일을 안 할 수는 없제."

하던 길심씨. 큰 딸인 내가 어떻게든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사고 후 허리 시술이 아닌 수술을 시켜 드렸어야 했다. 시기를 놓치고 나서 허리가 점점 굽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에 통증이 일어난다. 그때의 내 나이가 지금의 나이만 되었어도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여기저기에서 들어보고는 순전히 어머니가 내린 결정이었지만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내가 방관자인 것만 같다.


cc.jpg

품 안의 자식이었다가 오랫동안 품을 떠나 살다 이제 나이 들어 다시 품 안에 있어보니 알겠다. 부모의 한없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시골살이 중 저녁노을을 보러 농로를 따라 잠시 집 앞 들녘을 거닐었다. 금세 사위가 어두워오고 내게 무서움이 들 때 멀리서 아버지의 실루엣이 보이더니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희야!, 난희야!"

부르며 큰 길에서 두리번거렸다. 80중반의 아버지가 50중반의 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60이 가까워오는 딸이 무어가 걱정이라고. 부모에게 자식은 나이를 먹어도 자식이란 말이 딱 맞다.


나이 들어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어 오롯이 부모의 품에 꼭 있어 볼 일이다. 다시 두 분의 자식인 걸 확인하는 끈끈한 시간이 되었다. 같이 있어도, 떠나와도, 이래도 저래도 마음이 아픈 건 마찬가지이지만.

keyword
이전 17화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멀리스트의 공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