했다. 나는 속으로 난감했지만 봉투를 다시 꺼내어 세어 보니 5만 원짜리 7장이 들어 있었다. "으응? 엄마! 이렇게나 많이! 뭐여?"
"근디 내가 왜 얼마인지 보라는 중 아냐?"
"히힝.. 왜 엄마?"
"언젠가 이 근방에 쫙 퍼진 소문인디 한 번 들어봐라잉. 시어머니가 시골에 다니러 온 며느리를 위해 김치도 담고 여러 가지 반찬을 해서 들려보냈더란다. 서울에 도착할 시간이 넘었는디 전화가 안 와서 시어머니가 전화를 했다고 하드라. "아가, 그 반찬통 싼 보재기에 돈 300만 원도 같이 넣었는디 봤지야잉. 하는데 며느리가 갑자기 혼비백산하며 반찬을 안 먹을 것 같아 통째로 휴게소에 버리고 왔다고 하더란다. 그라고는 다시 그 휴게소로 가서 찾아봤자 있어야 말이제. 그랑께 돈도 받으면 바로 확인해봐야 하는 것이여."
"아이고, 그런 며느리가 있네잉."
"그랑께야. 그때 그 소문이 이 근방에 파다했당께."
했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성싶었다. 시간과 정성을 들인 부모의 마음을 어찌 휴게소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나는 그 돈을 다 받을 수 없어 다시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리려 하니 평소와 다르게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원래 성수씨는 길심씨가 돈을 안 준다며 늘 우리에게 하소연하며 일러바치던 분이다.
"내가 모태 논 돈은 다 느그들이 준 것이여. 느그엄마가 돈을 안 준당께."
하며 어떻게든 길심씨 돈을 울궈 내려고 한다. 어떤 때는 우리가 따로따로 나란히 드리는 봉투를 장난으로 웃으며 길심씨 것도 가로채려고 한 적도 있다. 용돈을 드리면 길심씨와 다르게 얼른 받아 챙기는 아버지다. 길심씨는 성수씨가 봉투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안 쓰는 돈을 어떻게든 쓰게 하려고 궁리를 하고, 성수씨는 경제권을 쥐고 있는 길심씨에게 어떻게든 돈을 받아내려 한다. 이런 성수씨가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치니 가슴이 울컥했다. 딸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의 마음이다. 자식의 마음이 부모의 마음만 같으면 이 세상에 불효 자식은 없을 것이다. 자식의 마음이 어찌 부모의 마음과 같을 수 있으리오만.
길심씨는 맥시멀리스트에 작은 것은 아끼고 아끼며 사는 분이지만 자식을 위해서는 큰돈도 뭉텅 내놓는다. 지난달, 흑산도 팔순 여행에도 농협에서 현금으로 큰돈을 찾아서 들고 왔다. 흑산도 택시투어 중 구경하는 가게에서 후박나무껍질도, 미역도 각각 딸네 집에 하나씩 사주고, 포장마차에서 먹은 회값도 싸 들고 온 현금으로 계산했다. 딸들이 말리면
"돈은 쓰려고 버는 거지 뭣할려고 번다냐?"
한다. 그래서 우리는 홍도 유람선에서 길심씨가 사주는 회도 또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엔 손주들에게 용돈까지 주셨다. 딸들이 여행 준비하고 손주들이 선물을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되로 드리고 말로 받았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을 것이다. 길심씨가 서울에 올라왔다. 다음날 첫 손주인 나의 큰 딸을 위해 피아노를 사주고 싶다고 매장에 가자고 했다. 이제는 다 커버린 아이들이 치던 피아노가 바로 그것이다. 얼마 후 길심씨의 작은딸인 내 동생 네에도 피아노를 사줬다. 나는 피아노를 볼 때마다 그때의 당당하고 허리 꼿꼿한 길심씨가 떠오른다. 20여 년 전 사 준 피아노가 한 대는 우리 집에서, 또 한 대는 동생이 운영하는 동네 책방에서 아직도 소임을 다하고 있다. 길심씨는 돈을 쓸 줄 안다.
우리의 성수씨는 오늘도 우리의 길심씨에게 말할 것이다. 안 봐도 안다. 늘 그러니까.
"어야, 삼봉이나 한 채 하세."
여기서 '삼봉'이란 매일 두 분이 치르는 꽃들의 전쟁, 화투놀이 종류의 한 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이 흔히 하는 '고돌이'는 두 분은 모른다.
"당신은 딸들만 생각하대. 오늘은 내가 당신 돈 좀 따야겄어. 흐흥.."
"내가 뭔 돈이 있어?"
"어야, 우리 집 돈주는 당신 아닌가."
이러면 길심씨는
"그래! 해!"
하며 전의를 불태우며 옥신각신 화투판이 벌어진다.
길심씨가 돈주라서 알아서 돈을 다 쓰는 것 같지만 새벽 네다섯시면 눈을 뜨고 누워 성수씨의 윤허를 받는다는 걸 나는 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느그 엄마는 느그들밖에 모르더라."
하며 어머니의 공로를 은근슬쩍 이야기한다. 내가 떠나온 마지막 날 새벽, 베갯머리송사로 성수씨에게 하얀 봉투에 '호동 아버지'라 글씨를 쓰게 하고 길심씨는 돈을 담았을 것이다. '호동'은 영암의 내 고향마을 이름이다.
나는 서울에 와서 하얀 봉투를 내보이며 남편에게도, 딸들에게도 자랑했다. 시골살이 하며 마을회관 정자에 간식도 사다 드리고, 병원도 모시고 가고, 외식도 했지만 내가 쓴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아 왔다.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듬뿍 들어 있어 아무 데도 쓸 수 없을 것 같다. 운전하며 올라오는 길, 나는 하얀 봉투로 아픈 내 마음 편하자고 휴게소에 앉아 인터넷으로 두 분이 드실 간식을 주문했다. 순전히 내 마음 편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