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26 라빌레트 호수와 공원
늦가을의 공기가 살짝 차가웠지만, 운하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라빌레트 호수(Bassin de la Villette)의 물가에 자리한 레스토랑 ‘그랑 물랭(Bistro Les Grands Moulins)’은 그런 날씨에 꼭 어울리는 곳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자마자 보이는 건 반짝이는 수면 위로 비치는 노란 은행나무와 붉은 벽돌 건물들. “C’est parfait(완벽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근사한 풍경이었다.
스테이크는 단순하지만 정직한 맛이었다. 겉은 노릇하게 구워졌고, 속은 부드럽게 붉었다. 함께 주문한 맥주 한 잔이 입안의 온도를 맞춰준다. 옆 테이블에서는 노트북을 펴놓고 일하는 사람, 산책 중에 잠시 들른 노부부, 그리고 유모차를 밀며 커피를 마시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누구도 바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곳의 시간은 늘 조금 느리게 흐른다.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운하를 따라 걸었다. 파리의 북동쪽 끝에 있는 라빌레트 호수는 파리 안에서도 유난히 ‘일상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잔잔한 물 위에는 카약과 작은 보트가 떠 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과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이 한가로이 풍경을 완성한다. 이 호수는 파리에서 가장 큰 인공 호수로 1808년 12월 2일에 물이 모두 채워졌다. 우르크 운하(Canal de l'Ourcq)와 생마르탱 운하(Canal Saint-Martin)를 연결하다 보니 일 년 내내 바지선이 정박해 있다.
노랗게 물든 포플러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호수와 같은 이름의 라빌레트 공원(Parc de la Villette)에 닿는다. 공원의 입구에는 오래된 회전목마가 있고, 그 앞에는 개를 산책시키는 노인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여행’이라는 단어가 단지 새로운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평온’을 경험하는 것임을 새삼 느꼈다.
공원의 끝자락에는 거대한 유리와 철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과학산업박물관(Cité des Sciences et de l'Industrie)이다. 겉모습만 봐도 압도적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그 규모에 다시 놀라게 된다. 우주, 생명, 산업, 사회 등 모든 주제가 이곳에서는 흥미로운 전시로 변한다. 아이들은 별자리를 보고, 어른들은 오래된 산업 기계 앞에서 멈춰 선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구형 돔 안에 들어가는 라 제오드(La Géode). 거대한 반사 구체의 표면에는 하늘과 나무, 건물이 뒤섞여 비친다. 그 안에는 천문관이 있어, 마치 우주의 일부가 된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조용히 내부 전시를 둘러보다가, 사회 문제를 다루는 ‘POLITIQUE?’ 섹션 앞에서 한참을 멈췄다. “Le cancer, c’est pas contagieux.” “Travail de nuit, travail me nuit.” 노동과 질병, 사회와 정치에 대한 짧은 문장들이 벽에 적혀 있었다. ‘과학’이라는 단어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걸, 그리고 기술과 인간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는 장소가 바로 여긴 것 같았다.
박물관을 나와 다시 운하 쪽으로 걸어 나올 때쯤, 햇살이 조금 기울어 있었다. 물 위로 떨어지는 노을빛이 도시의 회색빛 건물들을 따뜻하게 물들이고, 물결 위로 반사된 빛이 건물의 유리창에 반짝였다. 카페에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이 하루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 생각했다. 아마도 거창한 사건이나 명소의 감동이 아닐 것이다. 단지 ‘파리의 평범한 오후’ 속에서 느꼈던 그 여유로움이 진하게 남았다.
라빌레트에서의 하루는 여행이라기보다, ‘조용히 살아있다는 감각’을 되찾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관광객이 아닌 ‘생활자’의 속도로 걷고, 보고, 마시고, 느끼는 하루. 스테이크의 굽기처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한 잔의 맥주와 낙엽 진 운하길이 충분히 모든 것을 채워주는 그런 날이었다.
Nov,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