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25 벼룩 시장의 기원, 생투앙
파리는 중심을 벗어나면 전혀 다른 파리가 기다리고 있다. 샹젤리제나 마레 지구의 반짝이는 쇼윈도, 정갈한 카페 대신, 벽에 낙서가 가득하고 다리 밑을 따라 트램이 덜컹거리는 길. 화창하고 여유로웠던 그날, T3 트램을 타고 생투앙 벼룩시장(Marché aux Puces de Saint-Ouen)으로 향했다.
트램 티켓 한 장을 손에 쥐었을 뿐인데, 마치 파리의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입장권을 얻은 기분이었다. 표의 잉크 냄새와 차가운 공기가 섞여, 조금은 낯설지만 설레는 감정이 스쳤다. 트램 창밖으로 회색빛 고가도로가 스쳐 지나가고, 도시의 소음이 조금씩 멀어진다. 내리막길 끝, 플랫폼 너머로 낡은 간판과 벽화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생투앙의 공기 속으로 들어와 있다.
도심의 고급스러움 대신, 이곳에는 현실적인 파리의 일상이 있다. 상점 외벽에는 그라피티가 가득하고, 도로 표지판에는 수많은 낙서가 겹겹이 쌓여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이 어울렸다. 벽면에 붙은 “SHORED MARKET” 포스터 한 장마저도 이 거리의 일부였다. ‘Marché aux Puces(벼룩시장)’라는 이름의 기원 자체가 바로 이곳 생투앙에서 비롯됐다. 19세기 후반, 파리의 중고 상인들이 도심에서 쫓겨나 변두리 생투앙에 모여 장을 열기 시작했는데, 낡은 옷 속에 벼룩이 뛰어다녔다고 해서 ‘벼룩시장(Marché aux Puces)’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시장 초입은 무질서하고 활기찼다. 알록달록한 옷들이 천막에 매달려 있고, 사람들은 마치 오래된 보물을 찾듯 옷더미 속을 파헤친다. 거리의 상인들은 외치는 대신, 묵묵히 손짓으로 가격을 제시했다. 옷, 신발, 가죽 재킷, 향수,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랍 음악까지. 이곳은 다문화의 향연이었다. 파리의 또 다른 심장, 생투앙은 ‘다양성’ 그 자체였다. 생투앙은 단일 시장이 아니다. ‘Paul Bert Serpette’, ‘Vernaison’, ‘Malassis’, ‘Dauphine’, ‘Biron’, ‘Jules Vallès’, ‘Antica’ 등 7개 이상의 구역이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가구, 예술품, 복고 패션, 빈티지 음반 등 테마별로 나뉘어 있다.
햇살이 벽면의 벽화를 비추며, 낡은 건물 위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겹쳤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시장의 중심부로 들어서면 공기가 달라진다. 거친 냄새 대신, 묘한 고요함이 감돈다. 낡은 샹들리에가 천천히 흔들리고, 석고상과 구식 거울이 햇살을 반사한다. 어느 가게 앞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이 무심히 서 있었다. 그 뒤편으로는 크리스털 장식이 빛나고 있었다. 그곳엔 세월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누군가의 집에서 세대를 거쳐 온 가구들, 아직도 따뜻함이 남은 듯한 소파, 그리고 오래된 액자 속 초상화. 물건마다 이야기와 온도가 있었다. “이 의자는 1950년대 프랑스 남부에서 온 거예요.” 상점 주인이 말을 건넸다. 그 한마디가, 시간의 두께를 실감 나게 했다.
시장 구석으로 향하자 갑자기 공기가 다채로워졌다. 붉은 드럼통이 세워진 공터, 그 뒤로는 거대한 벽화가 펼쳐졌다. ‘NINA’라는 이름 아래 그려진 여인의 초상, 불타는 자동차, 그리고 손을 들고 있는 인형 같은 조형물들. 이곳은 단순한 벼룩시장이 아니라, 거리 예술의 박물관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면 ‘ART’라는 거대한 글씨가 벽면을 덮고 있었다. 이곳의 예술은 누군가의 허락을 받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에 맞추지 않는다. 그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 있는 도시의 기록이다. 20세기 초,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생투앙에서 영감을 얻었다. 피카소, 장 콕토, 코코 샤넬, 크리스찬 디올 등은 오래된 소품과 골동품을 수집하기 위해 이곳을 자주 찾았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영감의 원천으로 방문한다.
시장의 분위기가 또 한 번 달라졌다. 좁은 골목 사이로 오래된 가구점이 줄지어 있고, 의자와 테이블이 길가로 나와 있었다. 어느 골목에는 한 여인이 의자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대리석 조각상과 고풍스러운 액자들이 무심하게 놓여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골목 같았다. 길 위의 모든 장면이 영화 같았다. 누군가 문을 열고, 또 다른 이가 문을 닫는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그 속에서 나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장면’을 걷고 있었다. 오후 6시가 다가오면 일부 구역에서는 재즈나 샹송이 흘러나온다. 상인들이 자율적으로 트는 음악인데, “이제 하루를 마감한다”라는 의미다. 그래서 노을 질 무렵의 생투앙은 다른 시간대보다 훨씬 낭만적이다.
누군가는 이곳을 ‘거칠고 낡은 동네’라 말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살아 있는 도시의 숨결’을 느꼈다. 낡은 의자 하나에도, 오래된 벽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었다. 파리는 늘 아름답다. 하지만 생투앙의 파리는, 조금 더 진짜였다.
Nov,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