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플뢰르, 화가와 여행자들의 안식처

프랑스 #28 파리가 지겹다면

by 조디터 Joditor

파리에서 차를 몰아 북서쪽으로 두 시간을 달리면, 바다 냄새가 먼저 다가오는 작은 항구 마을 옹플뢰르(Honfleur)에 닿는다. 유리창을 때리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차창 너머의 세상이 물감처럼 번진다. 파리의 매끄러운 도시 풍경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낡고 정겨운 목조 건물들이 채운다. 비에 젖은 회색 지붕들이 차분하게 눕듯이 이어진 그 풍경이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힌다.


옹플뢰르는 오래된 항구의 향기를 품고 있는 마을이다. 한때는 어부와 상인들이 오가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화가와 여행자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골목마다 작은 갤러리와 아틀리에, 그리고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는 카페들이 이어진다. 노르망디에서 만났던 크루와 솔리에(La Croix Solier) 농장 주인아주머니도 이곳에서 갤러리를 운영 중이다.


이곳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이 있다. 바로 ‘갈레트’다.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 메밀 크레프인데, 프랑스 북부의 차가운 바람과 어울리는 음식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강원도 메밀전병 같은 거랄까? 비를 피하듯 들어선 곳은 Bistrot à Crêpes. 주황빛 차양 아래로 비가 뚝뚝 떨어지고, 내부에서는 구운 버터 냄새가 은근하게 풍긴다. 창가 자리에 앉자마자 커다란 접시 위에 얇게 구워진 메밀 반죽이 놓인다. 그 위로는 생햄과 호두, 그리고 부드러운 치즈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뭔가 간단한 조합인데, 먹고 나면 든든하다.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짭조름한 햄과 고소한 메밀, 달콤한 크림소스가 어우러지는 순간, 바깥의 빗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이 입안의 여운을 덮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이상하게 커피 맛이 더 깊어진다. 마치 빗소리가 커피에 스며든 듯.


창밖으로는 여전히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식사를 마칠 즈음엔 거짓말처럼 그쳤다. 마을은 은은한 물기 위로 빛을 되찾고 있었다. 젖은 돌길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항구에 정박한 요트들의 마스트가 미묘하게 흔들린다.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파스텔톤 건물들이 줄지은 항구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디서든 그림엽서 한 장이 될 법한 장면이 이어졌다.


옹플뢰르의 골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장이다. 초콜릿 향기가 나는 길을 지나면, 그 끝에는 칼바도스(사과 브랜디) 전문점이 나타난다. 병 안에 햇살을 담은 듯한 금빛 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진열대마다 붙은 손 글씨 라벨이 이곳의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숙성 15년’, ‘노르망디 사과’. 그 단어들만으로도 입안이 달큼해진다.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음 골목에서는 초콜릿 가게 Maison Georges Larnicol의 진열창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는 반짝이는 초콜릿 조각상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안에서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어른들이 있었다. 나는 결국 그들 사이에 섞였다. 고소한 프랄린과 다크초콜릿, 그리고 바다 소금이 들어간 캐러멜을 몇 개 고르고 나니 손끝이 행복해졌다.


길 건너편에는 현대적인 감각의 작은 갤러리 Galerie Artiane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 너머로 알록달록한 조형물과 회화 작품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미키 마우스 모양의 금속 구조물, 입을 크게 벌린 여인의 초상, 그리고 그 아래에 놓인 빨간색 자동차 조형물까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유쾌한 긴장감이 감도는 공간이었다. 들어가서 보고 싶었지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현실적인 생각, ‘수하물 무게 제한.’ 결국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 앞을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쉬워서,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한참을 바라봤다. 비친 내 얼굴과 함께, 작품 속의 여인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묘한 순간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옹플뢰르의 오후는 언제나 조금 느리게 흐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오후였다. 거리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어디선가 빵 굽는 냄새가 퍼졌다. 한 모퉁이에서는 작은 미술관이 문을 열었고, 그 옆 카페에서는 노년의 부부가 마주 앉아 크레프를 나누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갓 씻긴 돌길이 발밑에서 부드럽게 반짝였다. 나는 문득, 이런 평범한 순간이 여행의 진짜 선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 항구 쪽에 세워둔 차 앞에서 잠시 멈췄다. 이번 여행 내내 나의 발이 되어준 회색빛 DS7. 매끈한 차체 위로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마을의 색감이 그대로 차 위에 반사되어 있었다. 오렌지색 카페 차양, 짙은 남색 지붕, 벽돌색 창틀. 그 모든 색이 한 장의 수채화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파리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질감이었다. 도시의 세련됨 대신, 마을의 시간과 냄새가 있었다.


비로 시작해서, 햇살로 끝난 하루. 옹플뢰르의 하늘은 늘 그렇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에게, 한 장면쯤은 잊지 못할 풍경을 남겨준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을 담은 쇼핑백과 초콜릿,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이 밀려왔다. ‘조금 더 머물 걸 그랬다.’ 와이퍼가 한 번 더 유리를 쓸고 나서야, 그제야 출발했다.


어쩌면 여행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목적지가 아니라,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온도와 냄새, 그리고 한순간의 멈춤. 옹플뢰르는 그런 순간으로 가득한 마을이었다. 비와 바다, 커피와 갈레트, 그리고 나의 기억이 얽힌 작은 항구.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는 더 천천히 걸을 것이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단지 그 길의 공기와 색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


Nov,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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