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배우는 스타트업 #03] LP와 GP 그리고 스타트업
영화 <어느가족>에서 배우는 연금과 벤처투자의 관계
배울 수 있는 용어 : VC(Venture Capital), LP(Limited Partner), GP(General Partner)
<주의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어느가족>은 이상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이 가족의 구성원은 다섯명이다. 모두 혈연 관계가 아니지만 한 지붕 아래 모여산다. 각자의 역할은 있다. 아빠 역할을 하는 오사무(릴리 프랭키 분)는 일용직 노동자다. 아들 쇼타(죠 카이리 분)는 길에서 데려온 아이다. 이들은 시간이 날 때 마다 도둑질을 한다. 엄마 노부요(안도 사쿠라 분)도 세탁 공장 노동자지만, 그 공장에서 이것 저것 훔치는 생활형 좀도둑이기도 하다. 이모 아키(마츠오카 마유 분)는 주로, 성 노동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들의 보금자리는 할머니 하츠에(키키 린 분)의 죽은 남편 집이다. 주된 수입원도 할머니의 ‘연금’이다. 각자의 사연이 있어 이 곳에서 모여 살게 됐다. 이들은 영화에서 할머니 ‘연금’에 의존하는 경제 공동체이자 ‘유사가족’이다. 사회보장제도에는 크게 기댈 구멍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은 늘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다.
어느날, 이 가족에게 아동 학대를 당하는 아이 쥬리(사사키 미유 분)가 합류한다. 여섯명이 된 가족의 이야기는 그들의 숨겨진 사연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전개된다.
시바타 가족과 벤처캐피털에게
'연금'이란?
영화 ‘어느가족’은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이다. 알려진 영화로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괴물' 등이 있다. 주로 결핍이 있는 가족이야기를 다룬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어느가족’은 2018년 칸 영화제 최고의 영예인 ‘황금종려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가족이야기와 '벤처캐피털(VC)'의 투자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한 가지 주목해서 본 점은 '연금'이다. 이 영화에서 '연금'은 시바타 가족의 생계수단이자, 영화를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VC의 투자도 이 연금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VC(벤처캐피털) : 창업투자회사라 불린다. 기술력과 혁신성을 갖췄지만, 초기라 성장이 불투명한 기업에 투자하는 회사다. 쉽게 말해, 스타트업 및 벤처기업 투자사라고 보면 된다. 대출 위주의 기존 금융기관과 달리 주로 지분투자에 나선다.
스타트업의 성장에 있어 VC 투자는 거쳐가야할 하나의 관문이다. 창업자가 막대한 부를 갖춘 사람이면 그럴 니즈가 없겠지만, 대부분의 창업자들은 어느 정도의 성장단계에 이르면 ‘VC 투자유치’를 고민하게 된다. '네카라쿠배당토(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 당근마켓, 토스)'에 해당하는 혁신 유니콘 기업들도 사업 초기에는 이 VC들의 투자를 받아 성장 토대를 마련했다.
그렇다면 VC라는 곳은 그 많은 투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는 것일까. 다양한 자금조달 방법이 있지만, 대부분의 VC들은 쉽게 말해 ‘펀드’를 만든다. 기관과 일부 사람들의 돈을 모아 '펀드'를 만들고, 이 펀드 자금을 스타트업에게 투자하는 방식이다. 수익이 나면 펀드에 돈을 모아 준 사람들에게 돈을 배분한다. VC에게 이 펀드자금을 주는 기관은 매우 중요하다. 펀드가 곧 투자여력이고, 이 자금이 있어야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다. VC 펀드에 자금을 주는 기관 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연금'이다.
LP와 GP가 뭔데?
영화에서 시바타 가족의 각 구성원들은 나름의 역할이 있다. 할머니는 가족에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모여진 돈을 누군가는 이 가족을 위해 계획하고 사용할 것이다. 영화에서는 주로 엄마가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VC가 운영하는 펀드에도 이처럼 역할이 정해져 있다. VC가 만드는 펀드에 돈을 공급하는 사람 및 기관을 ‘LP(Limited Partner)’라 부른다. 직역하면 ‘유한책임사원’인데 그냥 쉽게 펀드에 돈을 출자한다고 해서 ‘출자자’라 부른다. 펀드의 투자를 책임지고, 운용을 총괄하는 곳을 ‘GP(General Partner)’라고 한다. VC가 그 역할을 한다. VC는 여러 개의 펀드를 만들고 이 펀드를 책임지는 GP가 된다. 영화에서는 엄마의 역할이다. 돈의 공급을 담당하는 할머니는 펀드로 치면 LP에 해당한다.
아래 기사를 보자.
DSC인베스트먼트는 오는 4일 결성총회를 열고 2100억원 규모의 'DSC 홈런펀드 제1호' 결성을 완료한다. DSC 설립 이래 가장 규모가 큰 펀드다. 국민연금공단이 주요 출자자로 참여한 펀드로 ... (중략)
2022년 8월 ‘머니투데이’ 기사 발췌
DSC인베스트먼트는 국내 유명 VC 중 한 곳이다. 이 운용사가 2,1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주요 출자자(LP)는 ‘국민연금공단’이다. 국민연금이 위탁한 자금으로 이 VC가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펀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GP는 DSC인베스트먼트가 된다.
연금은 투자업계의 '큰 손'이다
국민연금은 국민들이 위탁한 자금을 관리하고 운용한다. 2023년 기준 기금 순자산 규모는 무려 1,035조원에 달한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이 정도의 자금을 운용하는 단일 기관은 매우 드물다. 연금이 이렇게 국민으로부터 받은 돈을 그대로 예금통장에만 넣어두면, 젊은 세대들은 훗날 연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연금은 적절하게 이 돈을 투자해야 한다. 연금은 주식, 채권, 부동산 등 매우 다양한 상품에 투자해 이 돈을 '불린다'. VC 펀드에 대한 출자는 전체 투자규모와 비교하면 매우 소액이다. 하지만 펀드를 만드는 VC 입장에서 국민연금은 매우 '큰 손'이다.
국민연금 뿐 아니라, 국내에는 다양한 연금기관들이 존재한다. 사학연금, 교직원공제회, 과학기술인공제회 등이 대표적이다. 이같은 공제회들도 국민연금처럼 다양한 상품에 투자하며, VC 펀드에 자금을 공급하기도 한다.
아주 소액이긴 하지만, VC 펀드가 투자한 스타트업이 성공하면 연금자산도 늘어나는 효과를 가져온다. 많은 스타트업의 성공이 곧 우리의 연금고갈을 늦출 수 있는 셈이다.
월 수입 53만원 가족
스타트업 투자가 활발한 사회라면?
영화에서 하츠에 할머니가 받는 연금은 월 6만엔(한화 약 53만원)이다. 영화 개봉 시점은 2018년이다. 최근 일본 후생노동성연금국 자료에 따르면, 일본 70대 고령자들의 연금(후생연금+국민연금) 평균 수급액은 월 14만3973엔(한화 약 128만원)이다. 어찌됐든, 여섯 가족이 먹고 살기에 턱 없이 부족한 돈이다.
그러다보니 실제 일본에서는 부모의 연금을 부정으로 수급하는 사례가 종종 보고되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역시 좀도둑질을 하던 가족이 경찰에 체포된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영화를 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저소득층에 대한 안전망이 무너진 '일본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그린 영화인 셈이다. 이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을 때 일본 정부가 곧바로 축전을 보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VC의 투자는 이같은 사회안전망과도 연결될 수 있다. 국내의 경우 VC의 자금공급원은 연금 외에도 정부가 있다. 다양한 부처가 벤처펀드에 자금을 출자하는 LP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VC는 이같은 공적자금을 운용하는 '공공성'을 띄는 투자기관이다.
한국벤처투자라는 곳이 있다. 정부의 자금을 위탁운용하는 곳으로 중소벤처기업부, 해양수산부, 복지부, 환경부 등의 자금을 위탁받아 VC펀드에 자금을 공급하는 기관이다. 펀드에 자금을 공급하는 펀드라는 의미에서 업계에서는 ‘모태펀드’라고 부른다.
VC들은 컨테스트를 거쳐 모태펀드 GP로 선정될 수 있다. 선정된 VC는 모태펀드 자금을 바탕으로 은행, 캐피탈, 기업들과 같은 민간자금을 추가로 끌어모아 '펀드'를 만든다. 한국벤처투자 외에도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 산업은행 등이 이 같은 정책자금성 출자를 담당하는 LP다. 최근에는 지역자치단체도 지역활성화를 위해 벤처 펀드조성을 위한 자금을 VC에게 출자하고 있다. 정책자금은 이처럼 VC에게는 매우 중요한 LP다.
벤처투자가 만드는 사회안전망
정부기관과 지자체의 자금이 벤처펀드로 들어가는 이유는 '사회안전망'과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생각보다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스타트업의 경우 일자리 창출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VC 투자를 받은 4,613개 기업 중 3,339개사에서 4만8,025개의 일자리가 창출됐다. 특히 청년층의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초기 3~4명이 시작한 스타트업은 성장할 수록 인력 채용 니즈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다. 일부 스타트업의 경우 취업 취약계층에 대한 채용을 별도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국내에는 건설현장 노동자를 매칭해주는 플랫폼 스타트업들이 있다. 시바타 가족의 아빠가 이 플랫폼을 잘 활용했다면, 좀 더 많은 일거리를 찾아 소득을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모나 엄마 역시 스타트업 일자리가 늘어나는 세상에서 보다 합법적인 양질의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정부가 VC 출자로 좀 더 직접적으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사회안전망 관련 벤처펀드를 조성하는 것이다. 실제 보건복지부는 최근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투자펀드를 조성하는 계획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 펀드를 활용해 장애인을 돕는 시설 및 장비 스타트업 등에 투자가 이뤄질 예정이다. 이처럼 직접적인 사회안전망 강화 목적의 펀드를 조성해 관련 스타트업 생태계를 활성화 시키는 것도 좋은 대안 중 하나다.
하츠에 : 모두 고마웠어...
시바타 가족의 주춧돌이었던 할머니는 영화 속에서 이 대사를 끝으로 세상을 떠난다. (하츠에를 연기한 배우 키키 키린 역시 '어느가족'이 개봉한 지 두 달 뒤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가족의 주 수입원인 할머니의 연금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들은 연금을 계속해서 받기 위해 '엄청난 일'을 꾸민다. 궁금하다면 영화를 보면 된다.
‘어느가족’은 참 많은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영화다.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미, 경계에 대해 생각하면서 본다면 매우 담백하고 재미있는 영화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정부와 연금의 역할에 대해서도 한 번 쯤 생각해보면 어떨까? 스타트업 업계 종사자라면,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의 공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되새겨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업계의 성장에는 많은 사람들의 세금과 연금이 묻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