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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웅 Nov 17. 2018

증오발언의 해악: 제레미 왈드런

Jeremy Waldron, The Harm in Hate  Speech

왈드런의 <증오발언의 해악>은 증오발언 규제론이 나올 때마다 단골로 인용되는 책이다. 영어로 쓰인 책 중에서 가장 직설적으로 증오발언 규제를 주장하며, 또한 쉽게 구할 수 있기에 (하버드 대학에서 출판했기에 도움 받았겠지만) 증오발언 규제 찬반론에 대해 읽다 보면 도저히 피해갈 수 없다. 어쨌든 읽기는 했는데, 참 고민 많이 하며 읽었다. 과연 이 책이 증오발언을 규제하자는 규제옹호론자를 돕기는 했을까?  


왈드런은 뉴질랜드 출신으로 옥스퍼드에서 정치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옥스퍼드에서 법철학자 드워킨의 지도를 받기도 했고, 뉴욕대학 법대에서 가르치며 법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연구했기에 미국의 사법적 전통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R.A.V. 대 세인트폴 시’ 판례(1990)를 비롯해서, 스코키 판결(1977)과 브란덴버그 판결(1969) 등 증오발언을 규제하려는 당국의 시도를 차례로 무산시킨 미국의 수정헌법1조 전통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런가, 그는 미국의 언론자유 법리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논변을 제시하기보다 주의 깊게 에둘러 간다. 


일단 그는 미국의 판례법을 반박하기보다 증오발언 규제도 ‘이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언론자유의 판례법 원리가 ‘비잔틴 식으로 꼬였다’고 비꼬기도 하고, 미국의 집단명예훼손 판례에 대해 대안적 해석을 소개하기도 하지만 주요 판결의 논지를 반박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유럽의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증오발언을 규제하는 데 미국은 왜 그렇지 않냐고 묻는다. 유럽은 이런데 미국은 왜 달라야 하느냐는 식의 주장으로는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쨉을 날린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취약한 집단의 존엄성을 생각하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공격하는 증오발언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 즉 사회적으로 취약한 집단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발언을 규제해야 한다는 게 왈드런 논변의 핵심이다. 



왈드런의 논변은 다음 세 명제로 이루어진다. (1) 증오발언규제는 개인의 심리적 해악, 즉 정서적 침해를 이유로 도입하기보다 사회적 약자의 객관적 사회적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해야 한다.  (2) 집단의 사회적 지위가 ‘존엄성(dignity)’과 관련있는데, 존엄성이란 구체적으로 ‘평등하게 대접받을 자격을 부여하는 명성의 기초’라고 정의할 수 있다. (3) 존엄성의 보장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공격을 막는 것, 즉 사회적 안전보장(assurance)로 이루진다. 국가는 적극적으로 안정보장을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각각 그럴 듯하게 들리며, 셋이 모여서 뭔가 하나의 논변을 산출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찬찬히 검토해 보면 각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며, 합체해서 더 큰 혼란을 야기한다.


첫째, 주관적 피해에 대한 보상과 객관적 지위의 보장을 구분하자는 주장은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비록 교묘할지언정 해야 할 일을 못한다. 즉 전통적 내용규제론이나 수정헌법1보 판례법과 다른 요점이 없다. 예컨대, 소수자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서 타인의 발언을 규제할 수 있다는 식의 모종의 규제론적 논거를 제공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한다. 


왈드런은 증오발언의 대상이 되는 개인이나 집단의 정서적 침해를 보상하는 게 요점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으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증오발언 피해자의 정서적 고통과 위협감을 언급한다. 그는 의무론적(deontological) 관점에서 증오발언 규제를 주장하려는 듯 하다가 기회가 오면 살짝 결과론적(consequentialist) 관점으로 변경하는 것이다. 아, 이건 반칙인데 싶을 정도로 개인과 집단의 고통을 언급하다가, ‘그러므로 사회적 소수자의 지위에 대한 공격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논지로 다시 돌아간다. 이런 대목에서 나는 도대체 중간에 뭘 빠뜨리고 읽었기에 이렇게 의무론적 관점과 결과론적 관점을 넘나드는지 그의 글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읽을 수밖에 없다. 


뒤져보면 과연 필요한 연결고리를 숨겨두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왈드런은 주관적이고 심리적 피해를 반복해서 언급하지만, 그 자신이 논변을 위해서 사용하지는 않다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다른 교량적 논지를 제시한다. 증오발언은 ‘대기오염’과 같단다. 환경에 대한 해악과 같단다. 공공복리를 해치는 것과 같단다. 요컨대, 증오발언이 초래하는 객관적 피해란 모두가 함께 겪는 공적인 피해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럴 듯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며, 그것도 알 수 없는 비유일 뿐이다. 일단 왜 공공재 훼손으로 봐야 하는지, 이렇게 보면 전통적 내용규제론보다 뭐가 더 좋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진지하게 환경훼손론을 전개하는 것이라면 별도로 그 해악을 산정해서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시도가 없다. 말하자면 ‘기회주의적으로 결과론적 논변을 제시하기’를 슬쩍슬쩍 할 뿐이다.


둘째, 왈드런에 따르면 ‘존엄성’이란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것이다. 왈드런의 논변이 성공하려면, 이를 보장하기 위해 타인의 발언을 규제해야 한다는 식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없다. (공해든 오염이든) 해악을 유발하는 원인을 밝혀 사후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전통적인 ‘해악의 원리(harm principle)’와 ‘인과성의 원리(causation principle)’를 적용한 전통적 내용규제론이 된다. 또한 해악을 유발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행위기 때문에 혐오발언을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이는 ‘브란덴버그 판결’이 제시한 ‘(가)즉각적으로 불법행위를 유발할 것을 옹호하며,  (나)실제 그럴 가능성이 있는지 검사'한다는 수정헌법1조의 검증원칙으로 돌아가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그는 미국 언론자유 법리에 항복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왈드런은 이 두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서, 발언과 언론을 규제할 수 있다는 논지를 제시해야만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 논지를 찾을 수 없다. 


나는 심지어 왈드런이 제시하는 ‘존엄성’이란 개념이 실체가 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존엄성이란 원래 칸트적 개념이다. 이성을 활용해서 자신의 행위이유를 근거 짓는 인간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특별하다는 것이다. 비록 이 개념은 많은 논자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그리고 수많은 방식으로 규범적 명제의 전제로 활용되지만, 왈드런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왈드런이 본문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만, 그가 제시하는 존엄성 개념은 칸트의 개념이 아니란다. 그는 존엄성을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명성이라 정의하고 사용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 지위나 명성을 들어 규제를 주장하는 이유가 뭔가? 만약 관계적 해악(relational harm), 즉 피해자의 사회적 관계에서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결과론적 명예훼손 논리로 후퇴하는 셈이 된다. 왈드런은 ‘집단 명예훼손 법리’를 되살리려 하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논지를 전개해도 좋을 것 같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해악과 존엄성을 구분하자는 그의 제안 자체가 별 필요없는 것 아닌가? 


왈드런의 존엄성 개념을 옅볼 수 있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왈드런은 흥미롭게도 ‘인기 없는 신념’과 ‘인기 없는 신념을 믿는 자들’을 구분한다. 그리고 전자를 비판하고 비난할 수 있을지언정 후자에 대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기 없는 신념을 믿는 자를 공격’하는 행위란 소수자의 사회적 지위를 공격하는 일이며, 이것이 바로 증오발언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거의 소리를 칠 뻔했다. 뭐라고, 이슬람 교리와 관습을 위험하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 교리를 믿고 관습을 따르는 무슬림 신자가 공직에 출마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다고! 극우 보수이념을 비판할 수 있지만, 그런 이념을 가진 자가 공직에 나서는 것을 반대할 수 없다고! 이런 구분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바로 집단의 지위와 명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리라. 이런 주장이 어디로 갈지 나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셋째, 존엄성을 위해 사회적 안전보장을 제공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가장 기괴하다. 이 주장의 배경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롤즈의 <정의론>에 제시된 ‘질서정연한 사회’인데, 신박하게도 그는 롤즈의 논지를 따르는 것은 아니고 단지 롤즈가 제시한 ‘질서정연한 사회의 양상’을 비유적으로 활용할 뿐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다원주의적 자유주의로부터 언론 및 발언에 대한 규제론을 도출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를 이용해서 왈드런이 도입하는 증오발언 규제를 적용한 상태란 다름 아닌 에드먼드 버크가 제시했던 일종의 ‘환경미화 사회’다. 천박하고, 너절하고, 흉한 투쟁을 은폐하고 안전하고 아름다는 환상을 제시하는 사회다. 왈드런은 혐오발언을 쓰레기 치우듯 걷어내고 깔끔한 공식적 의복과 의례, 행사와 기념물로 가득 찬 ‘정치적 미학’을 실현하려 한다. 


내가 보기에 왈드런의 주장은 무리한 정도가 아니다. 위험한 쪽에 가깝다. 소수집단과 사회적 약자 집단, 그리고 역사적 고통을 받았던 집단을 언급하면서 그들을 위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들이 가장 견딜 수 있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실현할 수 있는 규칙 자체를 저버릴 것을 주장한다. 약자의 견딤과 희망의 근거가 되는 권리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사회적 약자를 반대하는 주장과 더불어 약자의 주장까지도 활발하게 개진되는 사회를 ‘왈드런의 존엄성’이란 모호한 근거로 들어 통제하려 한다. 


내가 신경과민은 아닐까? 천만에 말씀. 왈드런은 이 책의 본문에서 명백히 (가) 사회적 갈등에 대해서 참지 못하며, 갈등의 정기능에 대해 의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나) 사회적 합의와 안정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견과 변종, 변화와 지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드러낸다. 결정적으로 그는 (다) 국가 후견주의가 뭐가 어때서 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이 세 가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증오발언 규제론’을 말하고 있지만, 실은 이상한 몸짓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괴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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