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웅 Nov 16. 2018

루시디 <2년 8개월 28일의 밤>

2015년 10월 6일 

루시디의 열 번째 소설이라는데, 종교와 철학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즉 우화적이고 자기지시적이며 못견딜 정도로 웃프게) 다룬다는 점에서 차리리 <사탄의 시> 시즌2라고 하는 게 좋겠다. 유진의 시골에 있는 책방에서 신간을 들고 읽다가 도저히 놓을 수 없어 가지고 나와 읽어 치웠다. 꼬박 이틀이 걸렸다. 


<사탄의 시>를 봤을 때도 그랬다. 필라델피아 보더스 책장에 꼽혀있는 걸 발견하고, 아 이게 그 책이구나,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일주일이 지났고, 그 다음 달에는 미드나잇 칠드런을 찾아 읽고 있었다. 세상에 글빨 하나로 자신을 궐석사형 선고로 몰아넣고, 동시에 논문 쓰느라 바빠 죽는 유학생의 피같은 일주일을 날려버리는 글쟁이는 루시디 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그것도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철학자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언제나 그렇듯 너무 많은 주인공들이 나오기 때문에 ‘엔분의 일인공’이라고 해야겠지만), 신화와 역사를 섞어서 미래에 대한 소설을 쓴다면 이를 무슨 장르라 불러야 할까? 어떤 문체라 해야 할까? 루시디는 능청스럽게도 이야기 장르에서 가장 성공한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천일야화 이야기체에 21세기 헐리우드를 지배하고 있는 코믹북 스타일 연출을 접목했다. 우의철학-싸이파이-자기지시-미래소설이라고 하면 되겠다. 


그래 이게 문학이지. 목숨을 걸고 쓰되, 다만 그렇게 보이지 않게 쓰는 거지. 표지를 보면 벼락을 때려 맞는 이가 보인다. 예언적 인물이다. 이 자는 책에 등장하는 수퍼내추럴 중에서 가장 능력치가 낮은 자인데, 정작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들의 연정의 대상이 되고,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몇 십대조 할아버지와 같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수퍼내추럴의 몇 십대조 할아버지의 성이 루시디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성은 의사였던 루시디의 아버지가 그를 위해 12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철학자에서 따 온 것이다. 이 역사적 인물도 이 책의 주인공, 아니 엔분의 일인공 중 한 명이다.  


루시디의 글빨은 여전하다. 모든 페이지가 놀보가 박타는 대목이고, 모든 전환이 춘향전 어사출도 대목이다. 그래서 아쉽다. 그가 작중 인물을 빌어 제시하는 빛나는 종교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 떠들썩한 명절날 친척들의 객쩍은 농담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안타깝다. 정작 이 소설을 들고 어리둥절해 하다가 킬킬대면서도 심각하게 끝까지 읽었을 만한 독자들도 이 스타일 때문에 바로 그 첫 페이지를 넘길 생각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목의 2년 8개월 28일은 ‘천일 그리고 하루’를 뜻한다. 루시디는 그 자신이 매일 밤 목숨을 건지기 위해 이야기를 해야 했던 세헤라자드와 같은 운명을 지녔다고 생각하나 보다. 


책 속에 이런 구절들이 있다.  


- 질서란 헨리 제임스가 경고하기를 우주에서 오직 인간만이 갖는 꿈일 뿐인데 자연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혼돈스런 권능 아래 해체됐다. 


- 그러나 지니가 인간의 아이를 밴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다 임신해서 더 많은 머리를 낳는 격이다. 이야기가 독자를 만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낳는 격이다. 


- 새로운 뭄바이에서 그는 새롭게도 비본원적이었다. 


- 현명한 목소리 때문에 우리 조상은 잠잠해질 수 있었는데 그 목소리는 날씨를 은유로 간주하지 말라고 말했다. 


- 아이가 천연두나 볼거리에 걸리듯 그녀는 성격에 감염됐다.


- 칠면조가 부활절을 찬성하듯 


- 예전에 바그다드의 한 상인이 지역유지에 돈을 빌려 준 적이 있었다. 꽤 많은 돈이었는데, 갑자기 그 유지가 죽고 말았다. 상인은 생각했다. 이건 나쁜데. 돈을 돌려받을 수 없잖아. 그러나 신의 은총으로 그는 유체이탈이 가능했다. 물론 이는 유일신이 아니라 많은 신들이 있었던 세상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상인은 죽은 유지의 시체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돈을 갚도록 할 참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은 안전한 곳에 두고, 혹은 그랬다고 생각하고, 시체 껍데기에 들어갔다. 죽은 자의 몸을 빌려 은행으로 가는 길에 어물전을 지나야 했는데, 갑자기 죽은 대구가 그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죽은 생선이 웃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죽은 자가 돌아다니는 게 이상하다고 (something fish) 보고 그가 악령에 사로잡힌 몸이라 믿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지의 몸은 완전히 망가졌고 상인은 시체를 버리고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그것을 발견해서 이미 죽은 몸이라 생각하고 화장해 버린 뒤였다. 결국 상인은 돌아갈 몸도 잃어 버리고 돈도 돌려받지 못했다. 그의 영혼만 시장을 떠돌게 되었다. 혹은 그 영혼은 죽은 생선의 몸에 들어가서 이야가 흐르는 대양을 헤엄쳐 다닐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것이다. 좆같이 너의 운을 시험하지 말라. 


- (이야기 기생충이 인간을 좀먹는 것을 두려워 한 종족의 운명에 대해) 역설을 이야기만큼이나 증오했던 그들은 아마도 역설적으로 그들이 집합적으로 창조한 환상이 진실이라는 확신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 


- 철학자는 아이들이지, 지니는 말했다. 그리고 난 아이를 절대로 좋아해 본 적이 없어. 


- 반이성은 자기 자신을 물리친다네, 흙이 된 이븐 루시드는 흙이 된 가잘리에게 말했다, 비이성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지. 


-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를 전하면서 어떤 종류의 피조물인지 이해하는 그런 피조물이다. 이야기가 전달되며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떨어지고 최초의 근원에 있던 구체성을 잃지만, 오히려 단지 자기 자신뿐이라는 순수한 본질을 얻는다. 따라서, 바로 그런 표식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의 표식이 뭔지 또는 뭐 였는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해하는 것, 우리 자신, 혹은 우리가 무엇이 되어 버렸고 또한 무엇이 될 수 있는지가 되어 버린다. 


- 자바르다스트는 말했다. 옳고 그름, 합리성에 대한 관심은 인간적 고통이다. 즉 벼룩이나 개같은 것이다. 


- 폭군에게 새로운 것은 없다. 그는 선배들의 멸망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 돌아 보건데, 지니가 우리 선조들에게 풀어놓은 광기는 모든 인간이 품은 바로 그 광기였다. 


- 누군가 은유적으로 말했을 뿐인데 그 말이 사실이 된다면 끔찍할 것이다. 내가 인간이 창조한 신들이 인간을 멸망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말했을 때, 그건 대략 은유였다. 예기치 못하게도 그러나 만족스럽게도 내가 했던 말이 원래보다 정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우리는 알고 있다. 혹은 ‘알고 있다’고 해야 겠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결혼의 신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