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5일
학문의 자유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학문의 자유가 기본권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박유하 교수의 ‘학술적 의견’에 대한 명예훼손 형사고발을 보며 절망하는 내게 염규호 선생께서 책을 한 권 추천하셨다. 예일대 법대 학장이며 헌법학 교수로서 수정헌법1조를 탐구해 온 로버트 포스트(Robert C. Post)가 2012년 발표한 <민주주의, 전문성, 학술적 자유(Democracy, Expertise, and Academic Freedom)>란 책이다.
핵심 주장은 미국 수정헌법1조에 의거해 학문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유가 흥미롭다. ‘사상의 자유 시장’이니 ‘공적 토론을 통한 여론형성’이니, 뭐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란다. 미국 헌법이 민주주의에 공중의 ‘민주적 능력(democratic competence)’이 핵심 가치로 포함되어 있는바, 학문의 자유가 이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책의 분량도 작고 논증도 간결하지만, 분석적 엄밀성과 논변의 전개 수법이 돋보이는 책이다.
미국에서도 학문의 자유가 수정헌법1조 관련 사안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단다. 학문의 자유는 1967년이 되어야 ‘수정헌법1조의 특별한 관심사’가 됐다. 일찍이 1915년 미국대학교수협회(AAUP)는 <학문자유와 종신제도의 원칙에 대한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수반한 이념적 억압상태와 50년대 메카시즘을 겪은 미국의 학자들에게 학문의 자유란 명목적이었다. 1957년 스위지 대 뉴햄프셔 판례가 예시하듯이 (그렇다 그 스위지다.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당사자인 스위지!) 연구자의 학설을 문제 삼은 소송이 계속됐다.
학문의 자유는 이제 수정헌법 1조의 관심 사안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지만, 포스트 선생이 보기에 아직까지 ‘원칙(doctrine)’도 혼란스럽고 따라서 이론적 주장도 확립되지 않았다. 포스트는 최근 학문의 자유를 다룬 판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헌법 이론을 새로 구성해서 제시한다. 최근 발전된 ‘민주주의 이론’의 성과들(바버, 하버마스, 거트만 등을 인용한다)에 수정헌법1조 판례 분석을 결합해서 논변을 전개한다. 그 솜씨가 절묘하다. 깜깜한 숲속에서 노련하게 혈로를 뚫고 전진하는 길잡이의 그것과 같다. 일급 학자의 글이란 대체로 이러하다.
일단 포스트 선생은 학술담론이 ‘여론을 형성하는 공중의 자유로운 의견교환’과 다른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환기한다. 수정헌법1조는 전통적으로 후자, 즉 평등한 정치적 주체가 의견을 제시하고, 누구라도 다른 이의 의견을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며 수용할 자유’가 있는 정치적 의견형성 과정을 보호해 왔다. 그러나 학문적 소통은 이런 정치적 의견형성과 다르다. 옳고 그름을 가르고,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이 학술세계의 일이다. 무엇보다 학술적 권위가 있는 연구자와 그렇지 않은 신입 연구자들이 있는데, 이들 간의 소통은 물론 이들과 공중 간의 소통도 ‘평등하지 않다.’
따라서 수정헌법1조에 대한 해석론에서 발전한 ‘언론자유 이론’을 학문의 자유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언론자유 이론이란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자유란 (1) 담론주체의 표현적 자율성의 실현으로 자기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 (2) 사상의 공개시장에서 다양한 의견 간의 교환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것, 또는 (3) 공중이 공적 사안에 대한 의견을 접하고 의견을 형성해서 제대로 투표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등이다. 그러나 학술담론은 연구자의 자기실현을 위한 것이 아니며 (연구자 자기계발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한다), 연구자들이 사상의 공개시장에서 자유롭게 의견교환을 하는 것도 아니며 (학술대회나 학술지와 폐쇄된 곳에서 규제된 방식으로 주장과 자료를 교환한다), 평등한 인민의 자결권 수행과 관련이 없다 (정교수, 조교수, 학생 등이 있다 ㅠㅠ).
언론자유 이론 중 3번째 이론을 일컬어 특별히 ‘자치정부론'이라 하는데, 이는 ‘민주적 정당화(democratic legitimation)’에 대한 것이다. 수정헌법1조에 대한 ‘자치정부론'적 해석은 매디슨-미켈존-브렌넌을 거쳐 발전한 것으로 미국 헌법이 보호하는 언론(과 발언)이란 공중이 공적 사안에 대한 토론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는 언론(과 발언)이다. 왜냐하면 여론은 민주국가에서 정부구성을 정당화하는 최종적 권력 원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여론이란 ‘다수결’이나 ‘여론조사의 결과’와 같은 방법론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유권자가 공적 사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접하고 자신이 지지할 수 있는 견해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기초해서 입법이나 행정의 대표를 선출하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민주적 정당화’에 기초한 수정헌법1조 이론은 명시적으로 정부가 내용규제와 같은 방법을 동원해서 여론형성 과정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한다. 공중의 공적 사안에 대한 의견, 즉 여론은 선출직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을 형성하는 최후의 권력 원천으로 작용하기에, 권력을 통해 구성되는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정부가 바로 그 권력형성 과정에 개입할 수 없다. 만약 개입한다면 공중이 정부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정부가 자기를 스스로 구성하는 셈이 된다. 공중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필수적인 여론형성 과정을 누구도 함부로 (특히 정부는 법으로) 방해해서는 안 된다.
포스트 선생에 따르면 학문적 자유는 ‘민주적 정당화’ 가치와 거의 관련이 없다. 단 한 가지 조건을 제외하고 말이다. 학술담론이 민주적 정당화와 관련한 단 한 가지 조건은 지식을 산출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공중이 참된 신념, 즉 지식에 기반해서 민주적 정당화에 참여하는 데 돕는다. 무지한 공중이란 당착에 가까운 개념이다. 뭔가 알아야 민주적 정당화를 위해 평가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공중이 알아야 할 그 뭔가를 전문적으로 산출하는 집단이 있으니, 학술전문가라 한다. 요컨대, 학술세계는 민주적 정당화를 위한 지식 기반을 산출한다. 이 기능을 일컬어 포스트 선생은 ‘민주적 능력(democratic competence)’라 부르는데, 이는 민주적 정당화의 기능하는 데 필수적 전제가 되지만, 개념적으로 현실적으로 그와 구분된다.
앞서 제시했듯이 수정헌법1조는 ‘민주적 정당화’를 목적으로 공적 담론을 보호한다. 그렇다면 ‘민주적 능력’은 어떠한가? 수정헌법1조는 ‘민주적 능력’을 헌법적 가치로 추구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포스트는 ‘수정헌법1조 적용영역(First Amendment coverage)’와 ‘수정헌법1조 보호(First Amendment protection)’을 구분한다. 전자는 수정헌법1조의 원칙적 검증을 적용해서 신중하게 위헌 및 합헌 여부를 판정해야 하는 법률을 의미하고, 후자는 법원이 위헌 또는 합헌으로 허락 또는 금지하는 바를 결정하는 검증의 내용을 의미한다.
학술담론과 같은 전문가의 발언에 대해 수정헌법1조를 적용한 판례를 보면, 전문가의 발언이 어떤 특별한 성질을 갖기 때문에 수정헌법1조가 그것을 보호하거나 말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발언을 규제하려는 법률이 헌법적 가치를 지니고 있거나 말거나 하기에 ‘수정헌법1조 적용영역’에 속하는지를 먼저 판단한다. 결국 학문의 자유를 수정헌법1조와 관련해서 논의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해야 한다. 학술담론를 규제하는 법률에 대해 수정헌법1조 적용영역에 포함되는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런지 밝힐 필요가 있다.
뜻밖에 공적 담론이 아닌 사적 담론, 그것도 상업광고에서 수정헌법1조 적용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상업광고 규제는 수정헌법1조의 적용영역에 속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상업광고라 하더라도 사실적 정보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민주사회에서 자유로운 정보의 유통이 갖는 필수적 역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로운 정보의 유통이 어째서 수정헌법1조가 추구하는 가치라 할 수 있나? 포스트에 따르면, ‘민주적 역량’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즉 상업광고에 대한 규제는 (실은 ‘내용규제’이기에 더욱 그러한데) 공중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유통을 도우며, 따라서 공중의 판단과 교육에 도움을 준다.
그렇지만 학술담론과 같은 전문가 발언의 경우는 상업광고 규제와 성격이 다르지 않은가? 상업광고를 포함한 상업정보는 광고자와 광고수용자 간에 평등한 정보교환을 전제로 한다. 반대로 의사나 법률가, 그리고 학자와 같은 전문가가 제공하는 정보는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예컨대, 과실행위에 관해서 의사는 수정헌법1조를 들어 자신의 의견을 보호하라고 주장할 수 없다. 환자를 의사의 잘못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은 민주적 정당화든 능력이든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는 학술담론과 같은 전문가 발언이 수정헌법1조 적용영역에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법률이 전문적 지식의 전파를 방해함으로써 공중의 민주적 능력에 대한 보호 또는 저해가 초래될 우려가 있는 경우이다. 이 경우 해당 법률이 수정헌법1조 적용영역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민주적 역량’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2005년 연방정부가 제정한 <파산남용방지 및 소비자보호법(BAPCA)>에 법정대리인은 채무자가 파산을 의도하면서 빚을 늘리도록 조언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다. 비록 그 조언이 법률가의 전문지식에 따른 것이며 ‘법적’이라 해도 안 된다. 하급법원은 이 조항이 ‘전문적 법률적 조언을 제공하는 것을 방해’하므로 수정헌법1조를 적용해 위헌이라 판결했지만, 2010년 대법원은 전원일치로 합헌성을 인정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전문가의 조언이라 할지라도 파산을 의도하면서 빚을 내는 것은 법률지식의 남용에 속하고, 따라서 법률 전문가 집단의 의견에 따라 부적절하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결국 전문가의 발언의 자유를 위축하는 법조항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포스트는 2010년 대법원 판결을 해석하면서, 이 판결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검토한다. 문제의 사안은 (1) 법률가의 자율성 신장에 대한 것도 아니고, (2) 전문가 의견의 공개시장을 통한 더 정확한 의견을 찾는 과제도 아니며, (3) 전문가 과실행위에 대한 규제여부 문제도 아니다. 특히 하급법원이 판단한 바와 같이 과실행위, 즉 ‘전문가 지식전달이 시민의 판단을 저해하는’ 과실행위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한데, 그 이유는 여기서 문제된 법적 규제란 전문가의 조언을 전달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해당전문가들이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수정헌법1조를 적용해서 전문가의 발언을 통제하는 법률을 위헌으로 볼 수 없는 까닭은 그 법률이 ‘전문적 지식이 확립된 분야의 전문가 견해를 따랐을 때에도’ 규제하는 게 합당하기 때문이다.
이 결론을 학술 담론에 대한 규제에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학문이란 바로 해당분야의 자료와 정보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기준을 발전시키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다. 요컨대 학문 내에서 서로 치고 받고 논쟁하면서 누가 옳다 아니면 그르다 결정하는 일 자체가 지식을 산출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이다. 만약 정치세력, 사설기관의 이익, 국가의 통제 등 학문 외 세력이 법이나 규칙을 만들어 이런 학문적 논쟁 과정에 속한 어떤 의견을 통제하려 한다고 하자. 그 통제적 법이나 규칙의 내용이 규제하려는 의견이 ‘학문 내에서 토론을 통해 자율적으로 형성한 규범에 따라 보았을 때 문제가 없는 사안이라면’ 그 법이나 규칙의 위헌 문제가 바로 제기된다. 그러나 학문 내에서 전문가들이 판단하기를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의견이라면, 해당 법률이나 규칙에 대한 헌법적 고려를 해야 할 필요도 없다. 학술세계 내에서 해당 의견을 자율적으로 규제할 테니 말이다. 즉 그 의견이 학회지에 실리거나, 인용되거나, 교과서에 실릴 가능성이 낮다.
박유하 교수 명예훼손 형사고발과 관련해 내 생각이 적어도 한 가지는 그럴 듯 했던 것 같다. 나는 애초에 도대체 어떤 법이 공중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를 얻는 과정에 기여한 전문가의 견해를 ‘범죄’로 규정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박교수의 책이 공표되어 침해되었다는 그 ‘인격’이란 실은 바로 역사를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국제법적 책임을 묻고, 외교정책적 대안을 형성하는 ‘능력과 덕성’을 갖는 인격일 터인데, 그 인격이란 바로 역사를 이해하고, 책임을 묻고, 대안을 형성하는 담론들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 담론의 일부인 박교수의 책이 참인지 아닌지,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는 그 책을 포함한 공중의 의견형성 과정에 필수적인 학술담론에 의해 ‘사후에’ 가려질 것이다. (혹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방식이라면 이마저 무망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또한 내가 애초에 왜 이 문제에 대해 절망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우리 학계는 ‘계’라고 부르기 어렵다. 자율적 규범과 규율에 따라 스스로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규정할 수 있는 역량과 그 역량에 따른 ‘계의 경계’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다른 ‘계’의 간섭과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되어 고유한 가치를 추구하고, 고유한 담론적 실천을 전개하며, 그에 따라 성과를 내부적으로 보상하는 하위체계로 기능하지 못한다. 학술전문가들이라는 분들이 우리의 근대사, 우리 할머니들의 경험, 그에 대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스스로 주장하고 반박하고, 타당한 설명과 그럴듯한 해석들로 정리하지 못한다.
미국을 비롯한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학술적 담론에 대한 정치적 통제와 사적 영향력 행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곳과 여기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학문의 자유가 명목적 권리가 아닌 연구실, 교실, 광장에서 실제로 누리는 자유로 작동하고, 정부를 비롯한 권력기구가 ‘공중의 민주적 능력’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자행되는 법적 규제를 ‘위헌’이라고 규정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간에 차이가 있다.
우리 헌법은 제22조에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다른 기본권으로부터 분리된 핵심 권리 중 하나로 제시한다. 그러나 권리 당사자가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자유, 주장하지 않는 권리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우리 학술세계는 연구, 교육, 공적 기여를 수행하는 데 정치적 간섭이나 사적 영향력을 받지 않도록 자율성을 주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외부의 간섭과 참견을 유도한다.
마음이 복잡하다. 왜 이런 나라에 태어나 괴로운 사안에 신경 쓰며 헛 힘을 쓰며 살아가야 하는가 싶어서 비참한 생각이 들다가, 이런 고민거리와 연구 과제를 쉼 없이 던지는 이 나라에 태어난 데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싶어 각오를 다졌다가, 뭐 다른 어떤 나라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이 정도 괴로움이 없겠냐는 생각에 천연스레 표정을 고쳐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