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0일
원래 전공 관련 책은 그냥 노트할 뿐 서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도저히 그냥 두고 지나갈 수 없군요. 커뮤니케이션 학도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라 믿습니다. 물론 해석과 생각은 독자에게 각자 남아서 새로운 인간사의 일부가 되겠지만요.
매체는 내용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흐름을 전달하는 채널도 아니다. 인간의 확장인 도구라 할 수만도,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규범과 행위를 규율하는 제도라 할 수만도 없다. 매체는 실은 이 모든 것이며, 그래서 인간이 다른 존재들, 즉 신들과 짐승들, 그리고 다른 물체(여기에 다른 매체가 재귀적으로 포함된다)와 함께 서식하는 환경이 된다.
서식지-매체는 언제부터인가 인간이 함께 만들어 온 것이기도 한데 (그래서 인간에게 일말의 윤리적 책임이 부여되겠지만), 사실은 인간이 없어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며, 이렇게 인간에 대한 의미를 제외하고 볼 때 더욱 의미 있는 그 무엇이 된다. 매체는 문명의 전경이자 배경이고, 인간적 실천이자 물질적 대상이고, 자연이며 인공물이다. 매체는 이런 구별짓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며, 동시에 이런 구별을 모호하게 지우기도 한다. 매체는 이렇게 중간적이다.
흠, 요점은 간단하다. 그러나 이 요점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우여곡절을 거치는지!
이 책은 ‘매체 철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런데 피터스 선생이 보여주는 글쓰기는 학문의 분과로서 철학적 글쓰기를 넘어선다. 돌고래의 지능과 소통능력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화덕의 불이 인간의 형성에 미친 영향, 탑과 망루와 시계의 테크놀로지, 문자와 쓰기, 그리고 구글과 신성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것도 시적으로 그러하다. 따라서 이것을 무슨 글쓰기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명백히 키틀러의 범위를 넘어서고, 맥클루언의 재주를 압도하고, 하이데거와 씨름하는 수준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망라하면서 극복하는 것을 철학이라 한다면, 과연 매체 철학이라 부르는 것이 정당하겠다.
책을 읽다보면 각 장의 중간쯤에서 나열적이며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피터스는 이런 독자의 독서감을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서론에서 “모든 사실이 이미 이론이라는 것을 파악해야(Das höchste wäre, zu begreifen, dass alles Faktische schon Theorie ist)”한다는 괴테의 경구를 믿었던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방법론을 언급한다. 산만하게 나열하지 않고는 전달하기 어려운 요점이 있는 것이다. 일단 들어오면 빠져나가기 전에 지나야만 하는 길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매체 이론가들은 ‘매체의 이해’라는 맥클루언의 책 제목을 딴 첫 번째 장을 기대하며 읽어 나가리라. 그러다 놀라게 될 것이다. 이해는 말 그대로 ‘낮게 서는’ 것이며, 여기서 ‘낮음’이란 형용어는 인간적 기술에 대한 구조주의적인 범주화를 넘어서, 인간의 지식에 대한 탈구조주의적 해체를 구원하기 위한 ‘하부구조주의(infrastructuralism)’을 제언하기 위한 떡밥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겸손한 피터스 선생은 맥클루언과 키틀러, 멈포드와 라투르를 예의바르게 인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맞춰 처신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진심으로 인용하고 싶은 이론가는 멜빌과 휘트먼이고 (그래서 열광적으로 인용하고), 그가 믿는 이론은 보르헤스의 산문이다 (그래서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 피터스 선생은 휠더린을 활용했던 하이데거와 같이 자연과 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자가 아니면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
피터스 선생의 매체론에 대해 나는 당연히 ‘모든 것이 매체라면, 아무 것도 매체가 아닐텐데’라고 반박하고 싶다. 그러데 그는 이 반박도 예견하고 있다. 민망하게도 길버트와 설리번의 가사를 인용하면서 말이다. “모두가 중요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뭣도 아니죠.” 그러나 그는 이런 매체최대주의에 대한 비판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매체의 중간성’을 논하며 빠져나간다. 중간적이기에 누가 어떤 입장에 따라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고 달리 작용하는 개념이 매체라는 것이다. 책을 끝까지 읽고서 깨달았다. 그는 이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매체-최대주의를 선택하지 않고서는 문명을 관통하는 테크놀로지가 자연과 함께 형성한 매체의 본성, 즉 어디에나 있으며 사실은 어디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본성을 드러내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돌고래가 등장하는 2장이다. 돌고래는 온갖 기예를 갖춘 명민하고 사회적인 동물이지만, 무덤이 없다. 즉 기록 매체가 없는 것이다. 대신 돌고래는 바다라는 매체에 산다. 이 때문에 돌고래는 인간의 매체 이용능력과 대비되는 특성을 드러내는 생각실험의 대상이 된다. 돌고래와 달리 인간은 기록을 남겨서 시간이란 차원을 극복하고, 테크놀로지를 형성해 삶의 기반시설을 구성해서 자신이 서식하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존재다. 인간은 자연을 운항하는 문명의 배를 만드는 존재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배는 인간의 새로운 서식지가 된다. 인공물에서 새로운 자연이 나온다. 이것은 과도한 기술결정론이 아닌가, 걱정할 만하다.
내가 아는 가장 통렬한 ‘반기술결정론에 비판’이 이 책에 담겨있다. 기술결정론을 거부하는 자들은 정신과 물질, 인간과 사물, 동물과 기계, 자연과 기예를 구분하고 후자가 전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피터스가 보기에 반기술결정론자들은 바로 인간이 기예에 의해 형성된 존재이며, 기계로 삶을 유지하는 존재이며, 물질이 없는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에 눈 감고 있다. 피터스는 라투르의 ‘사물도 사람이다’는 명제를 되돌려, ‘사람도 사물이다’라고 말한다. 기술결정론이 아니라 인간기술 병존론이라 해야 겠다.
특별히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있다. 하이데거가 1차 대전 때 기후장교로 근무했다는 사실과 그의 사상을 연결한 장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나오는 ‘때를 기다리는 자’들은 세속적 시간이 아닌 심판의 일정을 따라 ‘카이로스’를 사는 자들인데, 기독교 신학은 이 심판의 시간을 기다리는 일을 ‘파수꾼’의 임무에 비유한다. 하이데거가 창조한 세계에서 인간은 신들과 하늘과 땅과 함께 사방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피터스가 보기에 하이데거가 말한 신들과 하늘과 땅과 함께 보는 인간이란 사건(Ereignis)을 관찰하는 자이며, 실은 기독교 신학의 파수꾼이자 동시에 1차 대전 때 독가스의 흐름을 관측하는 기후장교와 같은 존재이다. 즉 기후라는 매체를 통해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을 관찰하는 자이다. 현대인은 날씨를 뉴스 꺼리로 만들어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예측한다.
구글은 현대의 분석광 또는 기록광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찾아낸다. 구글은 인간의 기억을 외재화하고 관리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무한한 권능을 갖는데, 이 때문에 약점도 갖게 된다. 권능이란 물론 인간 기억의 통제이며, 약점이란 ‘비존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구글에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태깅하고자 하여도 우리는 언제나 ‘그래도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기에, 구글이 만들어 내는 존재론은 항상 부족한 무엇이 되고 만다. 피터스는 말한다. 우리가 관찰가능한 대상은 우리가 관찰자가 되는 데 필수적 조건에 따라 동시에 제한된다고. 인간은 역사 속에서만 관찰자가 될 수 있고, 그런 조건 내에서만 관찰 가능한 사건을 의미화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가다머의 해석론과 같은 접근이다.) 존재는 언제나 대상을 특정하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이며 뭔가 중요한 속성을 갖는 것처첨 보인다. (여기서 피터스는 보르헤스를 인용한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역시 보르헤스가 등장한다.)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존재를 지배한다.
현명한 자들, 예컨대 예수와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쓰지 않았다.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제자들이 기록해서 권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알고 있다. 기록을 남겨 권능을 행사한 이가 아니라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자들이 구원자라는 것을. 구글은 모든 것을 기록하면서 불멸의 존재가 되려 한다. 그러나 비존재, 상실, 죽음, 망각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불멸의 존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피터스 선생은 모든 중간적인 것을 매체로 개념화한다. 그러는 가운데 ‘인간의 원리(the anthropic principle)’를 적용함에 있어서 모순된 관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즉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요점이 핵심 논리의 전개를 방해하는 것이다. 피터스는 데이빗 도이치를 인용하며 인간의 원리를 소개하지만, 나는 이 개념을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에서 처음 배웠다. 이 원리의 요점은 이렇다. 자연의 존재가 확인되고 이해되기 위해서는 확인자와 이해자, 즉 자연을 자연으로 접근하는 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전제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만든 것도 아니고 (신들이 만들었다. 즉 누가 만들었는지 아직은 모른다는 뜻이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없이는 자연은 자연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는 앞서 제시했던, 관찰자가 존재하는 조건과 대상이 관찰가능하게 존재하는 조건은 같은 방식으로 제약된다는 명제와 연결되기도 한다. 이런 인간의 원리를 적용해야만 ‘테크네’가 ‘퓌지스’와 별도의 원리가 아니라는 피터스의 핵심 명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피터스는 인간이 없이도 자연이 존재하고, 의미있고, 새로운 매체가 되어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다고 결론 삼아 주장한다. 이는 명백히 과도한 하이데거리안이다.
나는 피터스 선생이 ‘하이데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뭔가 그르치고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 문제란 일단 그의 존재론은 들어가거나 말거나, 살거나 말거나, 둘 중 하나뿐인 딜레마를 의미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문제는 실제로는 약간 가혹한 측면이 있는데, 왜냐하면 운명적으로 그 존재론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살지 못하는 인생을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바그너의 악극과 마찬가지로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인간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독일어를 떠듬거리는 자가 하이데거와 바그너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다머의 정의를 따르면 역사적 인간이라면 무엇이든 어떤 방식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다), 독일어에 대해 ‘비본원적인 인간’은 그가 지은 존재의 집에 거주할 수 없다. 이 명제는 그 자신의 주장에서 도출되며, 내가 생각하기에 문제적이다. (바그너는 음악적 소통이기에 약간 사정이 다르다.)
피터스 선생은 독일어에 능통하다. 따라서 그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비독일어 사용자를 절망에 빠뜨리듯, 하이데거리안-피터스의 생각도 그렇게 할 개연성이 높다. 게다가 그는 영어로 쓰고 있지 않은가! 예컨대, 그는 하이데거를 인용하면서 하이데거의 사방에 짐승과 바다가 빠진 것을 의아해 한다. 내가 보기에, 인간도 짐승이고 바다는 땅에 의존하기에 사실 짐승과 바다가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피터스 선생은 더 많은 존재들과 더 많은 매체를 원하기에 짐승과 바다를 만들어서 사방이 아닌 육방을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피터스는 이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역시 어쩔 수 없다고 본다.
피터스 선생은 하이데거의 존재론 덕분에 소통철학이 아닌 매체철학에 경도된 것 같다. 그의 과거의 역작 <허공에 대고 말하기(Speaking into the Air)>에서 읽었던 소통적 주제와 비교해 보면 그렇다. 그 책에도 하이데거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예컨대, <놀라운 구름>에서 피터스는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하면서도 작업(work)이 산출하는 매체환경에 주목할 뿐 행위(action)에 수반하는 정치적 소통에 대해서는 별로 논하지 않는다. 아렌트를 하이데거 식으로 읽은 결과라고 본다.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있다! 그는 누구보다 하이데거를 좋아했고, 누구보다 그로부터 많이 배웠지만 (샤르트르에게 하이데거를 소개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또한 누구보다 하이데거의 역사적 모순에 절망했으며, 결국 그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기를 원했던 자이다. 레비나스는 존재론이 아닌 윤리학을 택하는데, 윤리학이 철학의 한 분과가 아니라 최고의 철학이라는 그의 명제는 물론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겨냥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윤리학이란 면대면 상황에서 발생하는 타인과 조우, 호명, 대화, 담론 속에서 형성하는 자기책임에 대한 현상학이다. 요컨대, 하이데거가 아니라 레비나스을 따른다면 매체 철학이 아닌 소통의 철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을 어쩔 수 없다. 또한 피터스가 암시했듯이,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가 본성을 드러내는 법이다. 나는 피터스가 가다가 돌아 온 그 길에 뭔가 있다고 믿는다.
* ‘놀라운 구름’이란 제목은 보들레르의 산문시에서 온 것이다. 인간과 신 그리고 황금을 증오하는 거지가 있었다.시인이 그에게 물었단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뭘 사랑하냐고. “난 구름을 사랑한다오..저 위에서...저 위에서...지나가는...저 놀라운 구름 말이요!” 심지어 제목까지 하이데거의 반인간주의을 증거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