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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운 Nov 01. 2024

우리 집 70세 빨래 요정

구식과 신식, 그 아찔한 갭





아빠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뽀송뽀송하게 마른빨래를 정사각형으로 보기 좋게 다림질하듯 접어 내는 재능. 부피가 작은 속옷이나 민소매는 돌돌 말아 깔끔하게, 양말은 끝부분을 안으로 잘 접어 넣어 반듯하게 착착!



그는 가끔 나나 엄마가 세탁기를 돌리면 마음에 들지 않아 따로 빨 정도로 세탁에 진심인데, 그래서 우리는 그를 ‘빨래 요정’이라고 부른다. 가끔은 그가 전생에 중세 유럽의 ‘대세탁사’나 고대 인도의 ‘빨래의 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식구들이 옷에 커피자국이나 화장품 얼룩을 묻혀 오면 그것을 거의 100% 복원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옷감을 어느 온도에서 적절하게 세탁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난 항상 애매한 빨랫감과 맞닥뜨렸을 때 그에게 물어본다.



“아빠, 이거 울 빨래해야 돼요?”

“어디 보자…. 응, 그건 울빨래”

“이건요?”

“이건 손빨래”  



이러한 이유로 우리 가족은 빨래를 전적으로 요정에게 맡긴다. 그건 우리가 ‘좋아하는 건 곧 재능이다’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 빨래 날은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토요일. 우리는 이 날에 맞춰 빨래를 내놓는다. 만약 급한 빨래라면 수요일에 내놓는 게 좋다. 수요일 빨래는 늦어도 금요일이면 돌아오는데 보통 두 번째 빨래날의 간격이 더 길기 때문이다. 아, 흰 빨래는 각자 빠는 것이 원칙이다.



그는 빨래에 대한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부드러운 건 다 손으로’다. 실제 아빠는 울이나 리넨, 실크 등 천연소재 외에도 당신 기준에 ‘부드럽다’고 판단되는 모든 소재는 대부분 손빨래를 한다. 수술을 두 번이나 해서 좋지 않은 허리로 어떻게 그렇게 손빨래를 하는지, 엄마나 내가 말려도 영 소용이 없다. 나는 항상 이 ‘보드랍다’의 기준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오랜 일로 거칠어진 그의 손에 부드럽지 않은 건 무엇일까’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질문의 답을 알아냈다. 어느 날 아빠가 또 열심히 손빨래를 하는 걸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건 지난 생신 때 사드린 감색 쟈켓이었다. 그때 알았다. 그에게 보드라움의 기준은 곧 ‘소중함의 정도’라는 걸.



얼마 전 빨래 요정님께 특별한 선물을 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해서 받은 성과급으로 드럼 세탁기를 사드린 것이다. 빨래를 대신해 드릴 수 없다면  차라리 좋은 파트너를 선물하자는 마음으로. AI 기능이 탑재된, 세탁물의 종류와 오염도, 무게에 따라 자동 모드를 설정하는 최첨단 기기로 플렉스…! 게다가 건조기까지 세트다.



우리 집은 드럼세탁기를 써 본 적이 없다. 그동안 사용해 온 통돌이는 오래되어 가끔 작동을 멈추었다. 세제가 다 풀리지 않아 옷감에 남아있을 때도 많았다. 무엇보다 무거운 빨랫감을 들어 올리는 데 힘이 많이 들었다. 허리가 안 좋은 아빠에게는 무리였다.



아빠는 처음에는 신식 기계에 영 적응하지 못하신 듯했다. "아이고… 나는 이거 잘 모르겠다. 에이아이인지 뭐기시인지…" 건조기군에게는 이런 평도 남기셨다. “이거 못 믿겠다. 어떤 불(?)로 말리는지 내가 알 게 뭐야…?! “



안 되겠다 싶어 주말 하루 날을 잡아 세탁기 사용법을 차근차근 알려드렸다. 영상까지 보여드리며 작동 원리에 대해 설명했다. 하루 종일 아빠 옆에 붙어서 세탁기 건조기를 직접 함께 사용해 보며, 이 녀석이 얼마나 믿을 만한 녀석인지, 빨래가 다 된 후에는 얼마나 새 옷처럼 보송보송한지 직접 만져보고 경험할 수 있게 도와드렸다. 그 후에는 한결 나아졌다. 아빠는 빠르게 드럼 세탁기와 건조기에 적응하셨고 이제는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녀석들을 잘 사용하시고 있다.



어쩌면 그에게 이 빨래의 시간이 ‘삶의 작은 통제권’이었을지 모른다.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성취‘였는지도. 들어가는 나이와 함께 점점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들고, 예전 같지 않는 체력으로 모든 것이 점점 버겁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작고 긴 사각형의 기계가 그에게 커다란 행복의 세계였을 것이다. 얼룩졌던 빨랫감이 말끔하게 세탁되어 나오는 걸 보며, 쭈글쭈글했던 옷감이 탕탕 소리와 함께 빳빳하게 펴지는 모습을 보며 작고 초라하던 그의 일상이 조금은 더 반듯해졌는지도.



이제 아빠의 새로운 세탁 왕국은 '기계'와 '손'이 함께 이루어내는 컬래버레이션이다. 세탁기의 도움을 받되, 손빨래의 손맛을 지켜가며 조금씩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 전에는 옷감이 상한다며 건조기를 처다 보지도 않던 그가 이제는 조금씩 건조기도 믿고 사용하고 계신다. 나는 언제까지고 우리 집의 '일흔 살 빨래 요정'이 그만의 방식대로 웃으며 빨래를 접어 주시길 바라본다. 물론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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