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다양한 가족이 있다
“책임감 없어 보여. 자기 앞가림 못하는 것 같아"
육아 중인 지인에게 ‘캥거루족’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물었을 때 돌아온 답변이다. 비슷한 경우는 또 있다. 한 리얼리티 예능에서 배우 장광과 그의 아들이 나왔다. 프로그램 속 아들은 서른 후반의 나이에, 배우를 꿈꾸는 미혼의 캥거루 족 아들로 그려졌다. 사람들은 영상을 보고 매서운 반응을 보였다. 댓글에는 ‘보기 싫다’ ‘저 나이까지 부모한테 경제적 독립도 못하고 뭐 하는 짓이냐’ ‘부모가 불쌍하다’ 등 다양한 악플이 쏟아졌다.
나는 그제야 사람들이 캥거루 자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면 집을 떠나야 한다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는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만 부모와 함께 사는 게 꼭 자립심이 부족해서라고 단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흔히 ‘독립’이라 하면 물리적인 분리를 떠올리지만, 사실 진짜 독립은 경제적인 자립, 심리적 자율성, 그리고 함께 사는 이들과의 협력 능력을 포함한 더 넓은 의미가 아닐까 싶다. 결혼해서도 부모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거나, 책임감 없이 굴거나 스스로 결정 내리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혼한 내 친구는 아직도 친정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다. 얼마 전 이혼한 지인은 이혼 과정에서 집을 처분해서 다시 부모님 댁으로 들어왔다. 결혼하고도 자립심이 부족해 심리적 어려움을 겪거나 아이를 키우면서도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종종 본다. 그렇다면 이들을 단순히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립심이 부족하다거나 ‘독립했기 때문에’ 성숙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렸을 때는 가족과 넷이서 함께 살았고 해외에 살 때는 룸메이트와 둘이서, 독립 후에는 혼자, 지금은 다시 부모님과 셋이 살고 있다. 함께 사는 사람과 숫자, 사는 방법은 제각각 달랐지만 그때마다 나는 혼자 살 때나 함께 살 때나 상황에 따른 문제 해결법을 터득했고 상대를 배려하는 법 혼자 사는 법 등의 지혜를 배웠다. 그리고 이것은 독립이나 기혼 여부와는 딱히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독립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멋대로의 평가를 내놓는다. 한 번은 지인 모임에서 한 남자가 대뜸 ‘진작에 혼자 살았으면 사모님이 되어있지 않겠냐’는 소리를 들었다. 친분도 없는 또 다른 이는 ‘남자들은 혼자 사는 여자를 좋아한다며 하루라도 빨리 집을 나오라’는 말도 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혈안이 되어있다. 누군가의 자립심을 증명하는 도구가 결혼 여부나 독립 밖에는 없는 것일까? 아니면 굳이 자신의 자립 여부를 다른 사람에게 증명해야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혼자 산다고 해서 반드시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부모님과 함께 산다고 해서 자립심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과 함께 살며 기혼 자녀가 챙기지 못한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서로의 존재에 힘을 얻으며 정서적 지지를 나눌 수도 있다. 누군가는 결혼 전 목돈을 모으기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을 수도 있고 개인적인 이유로 분가가 불필요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부모는 동거하는 자녀를 통해 적적함을 덜고 숙식 제공을 통해 당당히 경제적 분담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립의 정도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부모와 함께 살면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나만의 역할을 해나가며, 집안일에 참여하고 경제적으로도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께도 반갑게 인사하고, 저녁에는 함께 하루를 나누며 마음을 보탠다. 이는 함께 사는 공간에서 가족이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자, 내가 선택한 생활 방식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이런 ‘함께’ 사는 시간은 때론 더 큰 성숙을 요구한다. 먹기 싫어도 손 큰 엄마가 만든 엄청난 양의 음식을 다 해치우고, 부모님과 의견이 달라도 중간에서 타협하는 과정을 배우며 그 속에서 일상을 조율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간다. 집에 목돈이 들 때는 경제적 부담을 나누며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사는 친구들이 많다. 홀어머니와 사는 친구도 있고 결혼 전 부모님이 원해서 독립하지 않는 친구도 있다. 이들은 부모 부양의 의무를 다 하고 부모는 가족의 울타리를 제공한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진정한 성숙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단순히 구호가 아니다.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때론 더 큰 책임을 동반하기도 한다.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마찰이 생겨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일이야말로 성숙한 태도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내게 “언제 독립할 거야?”라고 묻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적절한 삶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것은 감히 단순히 결혼이나 출산, 독립의 여부로 판단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부모와 함께 살며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캥거루족의 삶이, 단순히 물리적 분리의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는 이유다.
결국 중요한 건 ‘누구와 함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아닐까. 가족과 함께 살든, 연인과 함께 살든, 아니면 혼자 살든 상관없이 ‘함께 사는 법’을 아는 사람은 어디서나 성숙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