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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Apr 06. 2024

[책리뷰]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은빛으로 빛나는 인생 선배님들의 유쾌한 시 모음집

솔직히 말하면 단편 소설집인 줄 알았다.

인터넷에서 이 책의 광고 페이지를 보았을 때, 내 눈을 단숨에 사로잡은 문구.


생겼습니다 노인회의 청년부

-고토 준 (51)


이 한 줄에 덥석! 구매를 결정해버렸다. 책에 관해서라면 한도가 없는 나의 욕심과, 좋은 책을 소장하고 싶다는 최근의 갈망이 빚어낸 성급한 콜라보였다.

게다가 환경을 생각해서 가급적이면 전자책을 구매하자는 결심마저 한 번에 무너져버리게 하다니... 글의 힘이란 이렇게나 강력하다.


하지만 노인회의 청년부라니! 얼마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진진한 문구인가! 노인회라면 60대도 막내라는데, 청년부가 생겼다는 것은 노인회에 부서 활동을 할 만큼의 막내 (?) 분들이 많이 들어온 걸까? 이제 막 생겼다는 것은 최근에 그분들이 노인회에 입성해야 할 만한 일이 일어난 걸까? 아니면 서러운 막내 노릇을 참다가 이제야 반발의 의미로 그룹을 결성?! 문장 하나에 수십가지 스토리가 떠오른다.



며칠 후 받아본 이 책은 단편 소설집이 아니라 시집, 정확히 말하면 '센류' 모음집이었다.

센류란 일본의 정형시 중 하나로, 풍자나 익살이 특징인 짧은 시를 말한다고 하는데

앞서 소개한 나를 사로잡은 글귀도 센류에 해당한다. 한 문장 속에 여러 가지 삶의 해학과 인생의 내공이 꾹꾹 눌러 담아져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재치 넘치는 유머 속에 피식하게 하는 힘이 있다.


특히나 이 책은 일본 실버타운 협회의 주최로 열리는 센류 공모전에 당선된 응모작들을 모은 것이다. 즉, 한 명의 작가가 쓴 책이 아니라 개인이 참가한 각각의 센류가 담겨 있어, 실제적이고 공감되는 다양한 인생 스토리를 즐길 수 있다.

 


시집이니만큼 짧은 시간에 완독 할 수 있었는데 그 여운은 길게 남았다.


각 시마다 작가의 이름과 나이가 표기되어 있는데, 간간히 30대 분들도 (두 분정도?) 있었지만 대부분 60-70대분들이었고. 그렇다 보니 시의 내용은 주로 노년의 삶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많다.


요즈음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기신 부모님을 보면서 내심 '아, 내가 정신없이 사는 동안 부모님께서도 많이 나이가 드셨구나' 하는 것을 느다.

그래서 이 책의 센류를 읽으면서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부분이 많았다.


종이랑 펜 찾는 사이에 쓸 말 까먹네

-야마모토 류소 (73)


아직 30대인 나도, 요즘은 돌아서면 뭐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는 경우가 잦다 (스마트폰의 폐해도 있겠지만).

하물며 부모님 세대는 오죽하실까. 예전에는 부모님이나 교수님들께서, 나중에 시켜도 되는 일을 마구마구 급하게 시킬 때 이해가 안 됐었다. 지금 한창 바쁜데, 일 끝나고 이따가 말하면 되는 걸 왜 굳이 지금 말씀하시지 싶었는데... 그게 다 나중에 가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생각날 때 해야겠다는 급한 마음에서라는 걸 최근에서야 깨닫는다.


또한 부모님이나 교수님들께서 말씀하시는 습관 중에, 아주 예전의 일을 마치 금방 있었던 일처럼 말씀하신 적도 많다. 며칠 전 일인가? 하고 들으면 90년대 이야기였을 때도 있었다.


요전에 말이야

이렇게 운을 뗀 오십 년 전 이야기

-오모리 지호 (43)


예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당신들의 마음을, 내 나이가 먹으면서 이제는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은, '내가 나이가 드는 건 상관없는데 부모님께서 나이가 드는 것이 싫어서 시간이 가는 게 싫다'는 요지의 글이 있었는데 너무나 공감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 가는 세월을 어떻게 막으랴. 어쩔 수 없다면 즐겁게 받아들이고, 몸과 세월의 흐름을 유머 있게 풀어낸다는 점이 책에서 소개한 센류들의 웃음포인트인 것 같다.


손을 잡는다 옛날에는 데이트 지금은 부축

-가나야마 미치코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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