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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회상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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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Oct 10. 2022

그리운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 덕성면 이망지리 이시다.

  아버지는 6.25가 일어난 해인 1950년 12월 공산당의 압박을 피해 서울법대를 나와 군 법무관으로 서울에 살고 계셨던 둘째 형님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봇짐 하나 들고 남한으로 오셨다. 한국군 부대를 따라 내려오면서 군 문관으로 근무하셨단다. 그런데, 형님은 처가를 따라 다시 고향으로 올라가시고 아버지 홀로 남아 평생을 실향민으로 살아오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남북 ‘이산가족 찾기’ 신청서를 내놓고 연락을 기다리고 계셨다. 

  아버지는 적십자사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한동안 하지 않으셨었다. “신청을 왜 안 하세요?” 여쭈어보니 “남한에 가족이 있다는 걸 북한 정부가 알면 고향에 계신 가족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 하셨다. 물론, 그건 잘 모를 일이었지만, 공산주의의 잔악함을 잘 아는 아버지로서는 그러실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긴 했었다.     


  겨우 아버지의 맘을 움직여 신청서를 쓰게 되었다. 신청서에는 고향 주소, 가족 상황, 고향 분들이 아버지를 기억할 증표 같은 것을 기록하게 되어있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걸 신청서에 한자, 한자 기록하면서 난, 할아버지, 할머니 함자와 큰아버지, 고모님들 성함에 학력까지 알게 되었다. 8 남매 형제 중 아버지는 4형제 중 막내셨고 누님 한 분과 여동생 세 명 이렇게, 내겐 큰아버지 세 분과 고모 네 분이 계셨다. 형제분들 모두 고등 교육 이상 받으셨다는 것을 알고 어려운 그 시대에 ‘할아버지의 능력이 대단하셨구나’ 하고 생각도 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친가가 굉장한 부자였다는 것을 친척분들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집안 큰어머님께선 “통일되면 너희는 받을 유산이 많을걸.” 하고 말씀하셨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말씀이셨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산가족 신청서를 쓸 때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6.25 전쟁 전 할아버지께선 서당 훈장님이셨고 당시 아버지께선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계셨는데, 전쟁이 나면서 공산당에게 ‘소시민(부르주아 계급)’으로 취급되어 재산을 모두 몰수당해서 ‘북청 읍’에서 고향인 ‘덕성 면’으로 옮겨가서 농사를 지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이산가족 찾기 명단에 들지 않았고, 그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아버지의 고향 방문에 대한 희망의 크기는 작아져만 갔다. 끝내 부모 형제를 만나 보지도 못하고 외롭게 지내온 수십 년을 뒤로하고 하늘나라로 떠나가셨다.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은 우리 삼 남매뿐이다.     


  난, 아버지를 정말 존경하고 사랑한다. 어느 집이든 아버지들은 다 좋은 분인 줄 알았다. 

  나의 아버지가 정말 좋은 분이라는 걸 조금 커서야 알았다. 난 행운아였다. 난 아직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멍하다.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에게 너무도 많은 사랑을 주고 가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침에 출근하실 때면 나는 큰 딸이라 예쁘다고, 여동생은 막내딸이라고, 남동생은 아들이고 막내라고 안아주고 나서야 출근을 하셨다.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주말이면 우리 가족을 데리고 고궁이나 유원지 등에 가서 사진을 찍어 주셨다. 사진 찍고 정리하는 게 아버지의 취미 셨는데, 아버지의 좋은 취미생활을 접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여고 친구 몇 명이 졸업을 기념이라도 하듯 한복을 입고 덕수궁에 사진 찍으러 가자고 약속을 했다. 카메라를 가져오기로 한 친구가, 못 가져가게 됐다고, 나에게 카메라를 가져올 수 없냐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친구 부모님께서 승낙을 안 하신 게 아닌가 싶다. 당시 아버지께선 카메라 사진 찍기가 취미 셨던지라 꽤 좋은 카메라를 가지고 계셨다. 그것을 알고 있던 그 친구가 부탁한 것이다. 나는 처음엔 안 된다고 했지만, 한복을 맞춰 입고 한껏 들떠있을 친구들 생각에 조심스레 아버지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값이 꽤 나가는 아버지의 소중한 물건 중 하나였기에 엄마는 “아버지의 귀한 물건 잃어버리면 안 된다.”라고 말리셨다. 그런데, 아버지께선 “다 큰 아가씨들이니 믿고 빌려주마.” 하셨다.      


  덕수궁에서 친구들이 각자 새로 맞춰 입은 한복을 입고 맵시를 뽐내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카메라를 목에 걸고 ‘KBS’ 방송국 기자라며 자신을 소개한 한 남자가 우리 사진을 대신 찍어 주겠다며 접근해왔다. 사실 난, 내심 불안한 맘이 컸지만, 남을 함부로 의심할 수도 없었고, 친구들은 깔깔대며 농담까지 해대서, 의심하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기에 사진을 찍어달라고 카메라를 내주고 말았다. 그랬던 것이 결국 ‘네다바이’ 당해 카메라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친구들과 나는 죄인 된 심정으로 부모님께 사과를 드렸고, 아버지는 별말씀 없이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 그 후 아버지의 소중한 취미 중 하나인 사진 찍기는, 내가 ‘네다바이’ 당해 카메라를 잃어버리면서 끝이 났다. 이 일은 살면서 늘 미안하고 죄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에게 화를 내신 적이 내 기억에는 없다. 바르게 자라기만을 바라셨다. 아버지와 엄마께 편지 쓰기도 가르치셨고, 좋은 책도 자주 사다 주셨다. ‘어린이 헌장’도 벽에 붙여 놓으시곤 ‘착하게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라’ 하셨다.

  술을 안 드셨던 아버지는 대신, 맛있는 과자나 빵, 아이스크림, 초콜릿 등 우리가 좋아하는 다과를 거의 매일 사 오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런 좋은 기억만이 떠 오른다.     


  어느 날, 우연히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적어놓은 일기 같은 메모였다.

  아버지께서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를 그리워하는 내용이었다. 글을 읽는 순간 내 가슴은 미어졌고 아버지가 딱하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공산당의 위협을 피해 잠시 내려온 이후 다시는 고향에 갈 수가 없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셨겠는가. 당시 미혼이고, 막내아들인 아버지의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의 크기가 얼마나 컸을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내가 그 메모를 보았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도 나 혼자만의 가슴에 묻었다. 다른 형제들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유달리 ‘빨갱이’라고 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싫어하는 이유도 어쩌면 아버지의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내 일처럼 가슴에 진하게 투영되어서 일 것이다.      


  오직 아내와 자식 삼 남매만이 전부였던 아버지를 두고, 엄마는 너무도 일찍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때 아버지가 엄마를 얼마나 그리워하셨는지, 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연히 다리를 다쳐 고생하시면서 아버지는 삶의 의욕을 잃으셨다. 어쩌면, 이산가족 찾기 명단에 몇 번 빠지고 나서 ‘가족 상봉에 희망이 없다.’ 생각하신 것도 한몫한 것 같다. 아들 며느리의 효도도 손주들의 재롱도 아버지의 허한 가슴을 채워드리기엔 많이 부족했었나 보다. 아버지는 삶에 애착하지 않으셨다. 어느 늦여름 쓰러지신 후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셨다.     


  맏딸이면서도 살기 바쁘다고 아버지를 자주 찾아 살가운 딸이 되어 드리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도 내 가슴에 옹이가 되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버지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난다.      


  지금쯤이면 하늘나라에서 엄마도 만나고, 부모 형제도 만나셨을 테지? 

  오늘, 아버지가 곁에 계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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