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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회상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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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Oct 10. 2022

엄마 생각

 난  지하철 층계를 오를 때 멈춰서 숨을 고르는 어르신들을 보면,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는 심장이 좋지 않아 약을 달고 사셨다. 고가 도로가 많았던 그 시절에 층계를 오를 때는 유달리 숨차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난, 으레 엄마의 등을 힘껏 밀어드렸다.

  요즈음은 지하철역이나 고가 도로에 노약자를 위한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등 다양한 시설이 설치되어 있지만, 그땐 그런 시설도 거의 없었다. 지하철도 많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가슴이 답답하다’ 하시며 지하철은 아예 타지 않으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힘들어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엄마 생각에 나도 모르게 “등을 밀어드릴까요?” 하고 말이 먼저 나왔다.      


  엄마는 유달리 솜씨가 좋으셨다. 

  아버지께선 엄마 손은 요술 손이라 하시면서, 나와 동생, 딸들에게 ‘엄마 솜씨 반 만 닮아도 시집가면 잘 살 거다.’라고 하셨다. 엄마는 요리도 잘하고, 바느질도 잘하셨지만, 특히 화초를 잘 키우셨다.

  집 안에서는 여러 종류의 선인장을 키우셨다. 요즈음은 많은 가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다육을 주로 키우지만, 그 시대엔 유달리 선인장을 많이들 키웠던 던 것 같다.

  마당 한쪽 화단엔 언제나 울긋불긋 여러 종류의 화초가 자라고 있었다. 엄마의 보살핌으로 화초들은 잘 자랐다. 채송화, 봉숭아, 분꽃, 나팔꽃, 맨드라미......, 코스모스까지 엄마의 손길을 받고 잘 자라고 있었다. 그 당시 난 꽃은 심기만 하면 그냥 자라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화초를 키워보니 그냥 크는 게 아니고 정성과 솜씨가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엄마는 그 시절 많은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집안이 가난하고 지방이다 보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지 못하셨다. 그러나 지혜와 높은 향학열은 여느 사람들보다 뛰어나셨다. 아버지께선 엄마의 요청으로 ‘한문공부’ 책을 사다 주셨다. 난, 엄마가 매일 노트에 한문을 쓰고 외우시는 것을 보고 자랐다. 독학으로 한문 공부를 하신 것이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런 엄마가 너무도 자랑스러웠었다.

  ‘공부해라!’ 말씀 한 번 하신 적 없었어도 몸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은 나의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예순이 한참 넘은 나이에도 사회생활에 적극적인 나의 모습은 어쩜 가슴 깊이 존경하는 내 엄마 모습의 자취가 아닌가 한다.      


  엄마는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58세에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지병인 심장병으로 갑자기 쓰러지신 후 며칠을 못 버티고 돌아가셨다.    엄마는 첫 손자인 내 아들을 반년 정도 키워주셨고, 일을 하고 있던 나를 위해 둘째인 손녀딸을 돌봐주러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거리가 먼 딸네 집까지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자주 와 주셨다. 오셔서는, 살림이 미숙하고 소홀한 딸을 위해 집 정리도 해 주시고 냉장고를 정리해서 여러 가지 반찬도 만들어 주셨다. 그러기를 몇 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신 것이었다.      


  막냇동생은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다 보니 맏이인 큰누나가 엄마 나이를 잘 넘길 수 있을까 걱정을 하기도 했다. 지금 내 나이는 엄마가 가신 나이보다 한참을 더 지났다.

  오늘 문득 엄마의 모습이 그려진다. 동그랗고 큰 눈으로 예쁜 웃음을 웃고 계신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가 나의 아이들을 돌보시느라 몸이 더 축이 나서 일찍 돌아가신 것 같아 너무도 죄만스럽다.     


  난, 늘 지혜롭고 선하게 사셨던 나의 엄마를 존경했다. ‘나는 엄마처럼 좋은 엄마로 살고 있는가?’ 반문한 적도 있다. 그리운 엄마의 뒷모습을 그리며, 아버지의 말씀처럼 엄마의 반이라도 닮았는지 생각해 본다. 부족함은 너무나 많지만 ‘엄마의 딸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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