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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회상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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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Oct 10. 2022

빙고!

  “우리 게임하자.”

  성숙이가 게임을 하잔다. 몇 가지 주제 중에 한 가지를 택해 연상되는 단어나 숙어를 듣고서 무엇인지 맞추는 ‘빙고’ 놀이란다.

  “좋아 네가 먼저 물어봐, 사람 이름 맞추는 걸로 해보자.”

  “여고 2학년 때 우리 윤리 선생님은?” “남선옥 선생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지하철 환기구 펄럭이는 치마.” “메릴린 먼로”

  “차털리 부인의 사랑.” “로렌스”

  성숙이와 마카오 호텔 방에서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서로 묻고 대답하며 ‘깔깔’ ‘호호’ 마냥 즐겁다.     

  성숙이는 여고 1학년에 만나서 지금까지 인생길을 함께 가고 있는 정말 친한 친구다. 정말로 오랜만에 온전히 둘이서 홍콩에서 마카오로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경희야! 너 ‘차털리 부인의 사랑’ 책 내가 너한테 선물한 거 기억나니?”

  “그러니? 네가 나한테 선물한 거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실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성숙이와 난 여고 1학년 때부터 서로의 생일을 꼭 챙겼었다. 각자 결혼을 하게 되면서는 전화로라도 한동안 기억해 주었다. 물론, 지금도 서로 생일이 며칠인지는 알고 있다.     


  우리는 졸음에 눈이 감기는데도 게임이 재미있어서 주제를 바꿔가면서 열심을 다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밤새는 줄 모른다.’고 내가 더 신이 나서 계속하자고 졸라댔다.

  하품을 해 대면서까지 놀던 우리는 ‘차털리 부인의 사랑’ 책 이야기로 화재가 돌아가면서 잠이 달아나버렸다.

  성숙이는 그 책을 내게 선물했을 때 있었던 비화를 얘기해줬다. 오래전에 성숙이가 내게 분명 얘기했을 텐데, 성숙이한테 그 책을 선물 받았다는 것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 전혀 새로 듣는 얘기 같았다.

  내가 학교에서 ‘차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고 있었는데, 거의 전교생들에게 카리스마 있기로 소문난 우리 담임 ‘홍성하’ 선생님께서 보시고는 “그 책 어디서 났니?”하고 물으셨고, 나는 친구 성숙이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은 거라고 했단다. 그 말씀에 선생님은 성숙이를 교무실로 부르셨단다.     


  “넌 어찌, 그런 책을 선물할 생각을 했느냐.”라고 물으셨고, 그 책을 사게 된 경위를 말씀드리게 되었는데, 성숙이도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내용을 알 리가 없었던 터였다.

  성숙이가 내게 책 선물을 하려고 서점에 갔더니, 마침 주인인지 종업원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대학생 정도 되는 남자가 있었단다. 친구에게 생일 선물할 책 추천을 부탁하니 ‘차털리 부인의 사랑’을 추천하더란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 생각하고 그 책을 사게 되었고 내게 선물을 한 거였는데, 아마 홍성하 선생님께선 그 내용을 이미 알고 계셨었나 보다.

  경위를 알게 된 선생님은 성숙이의 순수함 때문이었는지 그냥 웃으시며 성숙이의 우정을 칭찬하며 가 보라 하셨단다. 

  성숙이나 나나 여고 시절엔 순진무구 숙맥들이었던지라, 그 책을 다 읽고 나선 정말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았다.

  난, 몇 번이나 책을 읽다가 덮었었다. 물론, 다 읽었지만 정말 한동안 책 내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요즈음은 사회 자체가 많이 변해 더한 이야기도 많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시절엔 ‘D.H 로렌스’ 책 ‘차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마카오 호텔 방에서 우리는 밤을 새워 게임을 하며 깔깔대고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가랑잎이 굴러가도 웃는 나이’라는 45년 전 갈래머리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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