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에 살면서 느꼈던 것들
부산 전셋집에서 서울 월세방으로
그날은 제 인생 최악의 크리스마스이브였습니다. 저는 2년여의 시간 동안 부산에서 근무하다가 서울로 발령이 난 참이었고, 틈틈이 서울에 올라가 우여곡절 끝에 월세집을 구해뒀습니다. 부산집을 정리하고 용달에 짐을 실어 서울로 보낸 다음날, 용달 사장님과 만나기로 한 시간인 오전 9시에 맞춰 새벽 5시 열차를 타고 봉천역 근처 월세방에 도착했습니다.
계약금을 제외한 보증금과 한 달치 월세도 집주인 계좌로 이체했습니다. 73세의 집주인은 같은 건물 꼭대기 층에 살고 있어서 집주인이 직접 문을 열어줬습니다.
"어~ 어서 와~"
환영인사를 받고 현관 카드키를 전달받았습니다. 현관 비밀번호도 바꿨습니다.
집은 참 좁았습니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60만 원을 주고 이런 집에 살아야 하는구나, 대안이 없었지만 이곳에 2년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암담하긴 했습니다. 창밖의 하늘이 내 방이라고 생각하기로 했고, 서울로 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를 떠올리면서 긍정적인 생각과 콧노래가 나오는 기분을 장착했습니다. 이제 짐을 정리하고, 누워서 쉬다가 전입신고를 하고, 2년의 장거리 연애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 보낸 남자친구와 서울시민으로서 상봉을 한 후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입주청소를 한 게 이 모양이야?
콧노래는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집주인이 입주청소를 해주기로 했는데, 청소가 안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청소 비용을 임차인에게 청구하는 개념으로 나중에 월세 보증금 1천만 원에서 10만 원을 제한 990만 원을 돌려받기로 했는데 말이죠. 아까 만난 집주인이 '입주청소 했고, 내가 바닥은 아침에 한 번 더 닦았어~'라는 말도 했더랬습니다. 방바닥은 어차피 금방 더러워지니 그렇다 치고, 신발장을 열었는데 신발장의 선반이 칸칸마다 더러웠습니다. 흙먼지가 뭉개 뭉개 퍼져있었습니다.
'싸늘하다. 집 상태를 촬영해둬야겠어.'
저는 이사를 준비하느라 충분히 지쳐있었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 때문에 웬만하면 따지지 않으리 생각하고 물티슈로 슥슥 닦아내고 쓰려했습니다. 그런데 냉장고를 여니 케첩 자국과 함께 기다란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고, 싱크대나 화장실 세면대, 거울도 더러웠습니다. 촬영을 해둔 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이거는 성격이 둥글다 못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나도 참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B 실장에게 사진을 첨부하여 문자를 보냈습니다.
"실장님, 혹시 입주청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요? 신발장, 냉장고, 싱크대 이런 곳은 안 해주시나요?"
"냉장고, 싱크대 다 해주셨을 텐데 지저분한가요?"
"돈 주고 맡기신 거면 집주인 분께서 사기를 당하신 것 같은데요...? 하하..."
49년생 집주인이 94년생 월세입자에게
말도 안 되는 말을 합니다
잠시 후 집주인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사님, B 실장한테서 상황 들으셨죠? 이거 업체에 청소 맡기신 거 맞나요? 청소가 너무 안 되어 있어서요."
"어어~ 그게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애가 불쌍해가지고, 걔한테 맡겨서 한 거야~"
불길한 조짐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업체를 썼다더니 알바는 웬 말인가 싶었습니다.
"업체를 안 부르시고, 알바를 부르셨다고요? 이 방, 청소가 하나도 안 되어있는데요."
이어지는 집주인의 대사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어어, 아가야, 내가 만 원 줄 테니까, 네가 청소하고 쓰면 안 되겠냐?"
"... 그러니까, 지금 청소는 안 되어 있고, 청소 비용은 10만 원 받으실 건데, 만 원 줄 테니까, 직접 청소를 하라는 말씀이세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미안해, 미안하고~ 내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달려가서 걸레 갖고 바닥이라도 닦아주고 싶은데, 나도 바쁘고 업체를 다시 부를 수도 없으니까, 내가 점심값 줄 테니 아가야 네가 청소하고 쓰라는 말이지."
내가 똑바로 이해한 게 맞나 생각하는 동안 정적이 흘렀습니다. 청소를 하고 살 수야 있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인이 원칙을 지키면서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예의를 차려 좋게 말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청소 비용을 나중에 보증금에서 차감하기로 하셨는데, 그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게 무슨 말이야?"
"B 실장이 그러는데, 입주 청소해주시는 조건으로 나중에 보증금 천만 원에서 10만 원 제하고 돌려주실 거라고 하던데요."
"아니, 그 말을 그렇게 알아들으면 안 되지 이 새끼야."
귀를 의심하느라 잠시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비정상적인 논리로 이야기를 내뱉는 걸 듣고 있는 와중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욕설을 들었습니다.
"말은 내뱉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잘 들어야지. 알지? 내가 지금 바쁘니까, 좀 이따 한두 시간쯤 뒤에 갈게."
도대체 뭘 잘못 알아들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생각했습니다.
'엄마 미안. 더 이상 신경 안 쓰게 하고 싶었는데, 이건 전쟁이야.'
어머니께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욕설을 들었다는 말은 할까 말까 하다가, 해버렸습니다.
"뭐? '이 새끼야'라고 했다고? 당장 KTX 열차 표 끊어. 엄마 간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라 가까운 시간의 열차는 모두 매진이었는데, 운이 좋게도 두 어 번 새로고침을 하고 표를 예약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친구에게는 상황을 설명하고 데이트를 미루기로 했습니다.
"전쟁이다. 건투를 빌어줘."
좋은 말로 하면 해결이 안 되는 세상에서 엄마 장군은 은퇴할 수 없습니다. 딸내미도 이제는 조무래기에서 장군감으로 거듭나야 할 시간입니다.
* 2030 본격 내 집 마련 에세이 ’내가 내 집에 살고 싶을 뿐이야‘가 책으로도 나왔어요!
커버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