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에 살면서 느꼈던 것들
녹음을 못했다
어머니께서 서울로 오시는 동안 저는 B 실장과 몇 번 더 통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욕을 하셨다고요? 어... 그러면 안 되는데."
"평소에도 언행이 거친 편이신가요?"
"사실 저희한테는 이 놈 저 놈, 이 새끼 저 새끼 하긴 하는데, 저희는 진짜 오래 알아왔으니 손자같이 대하시는 거긴 하지만, 고객님께는 그러시면 안 되죠."
"다른 세입자와는 이런 일이 없었나요?"
"음, 사실 젊은 여성 세입자 분한테 '너는 젊은 애가 일찍 일찍 안 다니고 뭐하냐, 넌 뭘 이렇게 택배를 많이 시키냐'라고 잔소리하신 적이 있다고 듣긴 했어요. 그때도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그러시면 큰일 나신다고 말씀드렸는데, 욕은..."
기가 막혔습니다. 전적이 충분한 집주인인데 그걸 몰랐다는 것, 알 길이 없었다는 것에 짜증이 났고, 마치 요즘 젊은 사람들이 유별나게 굴어서 집주인이 몸을 사려야 한다는 듯이 말하는 것에 또 짜증이 났습니다.
"근데 제가 여사님께 여쭤보니까, 욕을 안 하셨다 하던데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저한테 분명 '이 새끼야' 하셨는데."
사실 이 시점에서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던 게, 저는 아이폰 유저이고 아이폰은 녹음이 되지 않아서 집주인과의 통화를 녹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집주인이 발뺌을 하면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미안하다, 청소가 안 되어 있다니 10만 원은 내가 다시 돌려주겠다' 등의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했지, 비정상적인 대화가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게 실수였습니다. 이후의 통화는 스피커폰을 켜놓고 다른 기기로 녹음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통화는 녹음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은 말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B 실장이 저와 집주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통화를 하는 동안,
"여사님께 '욕 하셨어요, 안 하셨어요.'하고 여쭤보니까, '어, 난 안 했는데... 내가 그랬나...? 모르겠네...?' 하시더라고요."
"여사님께서 욕은 관리인한테 하신 거라네요."
"다시 여쭤보니까 손녀 같아서 그러셨다네요."
열 받는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여사님께서 녹음하신 내용이 있다고 하니, 그걸 들어보면 될 거 같아요."
오? 내가 녹음을 못했는데, 녹음이 되어있어? 이게 웬 다행스러운 일이냐 싶었지만 침착을 유지했습니다.
"네, 그러시죠. 저한테 욕하신 게 맞아요."
욕설을 들은 게 맞다고 주장하고 그걸 인정받으려고 해 본 것은 또 처음입니다. 증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덕분에 전의는 더욱더 타올랐습니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려고 한 거야?
어머니는 머리도 채 못 말리고 서울로 오셨습니다. 서울역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택시를 타고 가는 와중에 전략을 구상했습니다.
"이거 계약 파기하자. 그런 주인이랑 어떻게 한 건물에서 살래?"
"응, 계약서에 입주 청소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 있고, 집주인이 계약 조건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은 거잖아."
어머니께서는 집을 사진으로 본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실제 방 상태를 보고는 기겁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려고 한 거야?"
"다 잘만 살아. 엄마가 좋아하는 남향인 데다가 이렇게 바깥이 뻥 뚫린 곳은 없어. 하늘을 내 방 삼으려 했다니까."
"헛소리 하고 있네. 혼자 알아보라고 믿고 보냈더니 세상에, 이런 곳에 살라고 서울 보낸 줄 알아? 계약 파기하고 더 넓은 곳 알아봐!"
'서울은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고, 회사가 오라고 해서 온 건데!'라고 하면 심기를 거스르다 못해 역류시킬 것 같아 자중했습니다.
집주인이 드러누웠다
잠시 후 B 실장과 관리자 C도 도착했습니다. 관리자 C의 명함을 보니 공인중개사 이사라고 되어있었는데, 크리스마스이브에 불려 나와서 그런 건지,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 그런 건지 말투에 짜증이 배어있었습니다. 관리자 C가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평소에 저혈압이 있으셔서 충격을 좀 받으시고 댁에 누워계셔서 제가 대신 왔어요."
"어머니요? 아들이세요?"
"아니요, 워낙 친하다 보니 엄마, 아들, 하고 지내고 있어요."
이 또한 기가 막혔습니다만 상황을 다시 설명했고, 계약을 파기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여기 보세요. 청소가 안 되어 있어요. 냉장고도 열어 보세요. 업체가 사업을 하는데, 평판이 있지. 이렇게 청소를 엉망으로 해두진 않았을 텐데요."
"아, 그게. 부동산에 아르바이트생이 있는데, 어머니가 좋은 마음으로 그 친구에게 용돈 좀 주고 청소 네가 좀 해라, 이렇게 해서 하신 거예요."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용돈을 주고 싶으면 본인 돈으로 주셔야지, 왜 임차인 돈에서 떼다가 주시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해뒀으면, 최소 받기로 한 돈은 안 받겠다고 하든지, 해결책을 이야기해야지, 어떻게 만 원 줄 테니 청소하고 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욕설을 뱉을 수가 있어요?"
"어머니가 원래 그런 분이세요."
기가 막히다 막히다 터질 것 같았습니다.
"원래 그렇다고요?"
"평소에도 어머니가 언행이 좀 거친 편이세요. 나쁜 의도가 있으신 건 아니에요."
"원래 그런 분이라는 이유로 한 평생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욕설을 들어본 적이 없는 제가 그걸 감당해야 하나요? 그리고 나쁜 의도가 아니었으면 만 원을 점심값으로 줄 테니 직접 청소하고 살라는 이야기는 안 하셨겠죠. 계약 파기해주세요."
B 실장과 관리자 C는 이야기를 듣고 집주인이 사는 꼭대기층에 가서는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항복 선언
그러는 동안 어머니와 저는 용달을 또 새로 알아봤습니다. 다행히 이모 댁이 인천에 있어서 그리로 이동해서 잠시 머물기로 했습니다. 잠시 후 B 실장과 관리자 C가 돌아와서는,
"같이 녹음 들어봤는데, 고객님께 욕을 한 게 맞더라고요."
"짐 빼주시면 보증금이랑 월세 내신 거 돌려드릴게요."
기나긴 싸움이 될 것을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항복 선언을 받았습니다.
"왜 우리가 먼저 짐을 빼야 하죠? 방금 용달 업체랑 통화했어요. 지금 용달 온다고 하니까 보증금이랑 월세 돌려주세요. 그럼 짐 옮기고 바로 출발할게요."
엄마 장군께서 완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보증금과 월세를 고스란히 돌려받고, 곧이어 도착한 용달에 짐을 실었습니다. 열심히 짐을 옮기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왜? 왜 울어!"
"내가 평소에 맨날 나 이제 30살 다 되어 간다고, 독립하게 내버려 두라고 했는데, 더 이상 엄마 신경 안 쓰게 하고 싶었는데, 너무 미안해서 그러지. 내가 잘못한 거 같아서."
"네가 뭘 잘못했는데? 집주인이 그런 사람인 줄 네가 어떻게 알아? 너 여기 살면 엄마 더 속상할 뻔했어. 차라리 잘 됐어. 이모집에 있으면서 천천히 다시 알아보자."
그렇게 최악의 집주인과의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이모 댁에 갔더니 이모와 이모부가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며 그래도 잘 됐다며 반겨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날은 사촌동생의 아내가 될 사람이 집으로 인사를 오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민폐 중에서도 최고의 민폐를 끼쳤음에도 이모와 이모부, 사촌동생은 저를 환영해주셨던 것입니다. 왠지 청운의 꿈을 안고 사업을 성공시키겠노라고 떵떵거렸던 사람이 패잔병이 되어 돌아온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촌동생과 사촌동생의 아내에게는 나중에 꼭 비싸고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겠노라 약속하고 다시 집을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이모, 이모부, 엄마와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책장을 보다가 'Answer Book'이라는 게 있길래 '얍!' 하고 한 곳을 펼쳤더니, 마법처럼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라는 문구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래,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액땜 한 번 세게 했다!'
오랜만에 엄마와 같은 방에 누워 자기 전에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엄마, 오늘 너무 정신없고 힘들었지? 미안해. 고마워."
"그러라고 엄마가 있는 거야. 맨날 독립한다고 뭐시라 뭐시라 하더니 잘 됐다."
어머니께서 고소하다는 듯이 이야기하셨습니다.
"흐흐. 독립해야 하는데 망한 듯."
"엄마는 왠지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들어."
"응. 꼭 그렇게 만들 거야."
요즘은 또다시 독립을 외치고 있지만 그날은 그렇게 아름답게 마무리되었습니다.
* 본 브런치북은 내용을 상당 부분 보충하여 동일한 이름의 도서로 출간되었습니다:)
커버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