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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솜 May 31. 2024

제사 - 3

시댁에서 제사란?

"집집마다 오이 먹는 방법도 다르다.

똑바로 먹는 집도 있지만 꼭지부터 먹는 집도 있다.

결혼하면 너도 우리가 먹는 방법대로 해라”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어머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40년 전, 며느리가 내 주장을 할 수 없도록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어머니는 미리 정의를 내리셨다. 한 동네 살면서 태어날 때부터 보아온 남편과 시부모님은 결혼이 결정되면서 달나라에서 온 사람들보다 낯설었다. 내가 두 집안 간에 가장 다르게 느낀 것은 제사의 정신과 형식이었다.     




시아버지는 개성에서 피난 오셔 종로구 옥인동에서 태어나셔서 서촌에서 자란 시어머니와 결혼하셨다. 역사적으로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고 서울 서촌은 조선 오백 년 수도 한양에서도 가장 핫플레이스였다. 지금도 경복궁 서쪽 인왕산 아래 서촌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한양의 신문화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의 강남이라고 해야 하나?     


시어머니는 의식주가 까다로우셨다. 종로구 옥인동은 경복궁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동네다. 예로부터 궁과 관련된 문물이 풍부했던 곳이다. 어머님도 큰 기와집에 사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좋은 옷과 맛있는 것에 조예가 깊으셨다. 아버님은 개성에서 삼밭은 하셨다고 한다. 일가친척들은 상인이셨고 회사를 경영하셨다.   

   

결혼했을 때 시댁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셨다. 명절이면 아버님의 사촌과 그 자손들까지 와서 보름 전부터 명절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친척들이 모이면 시아버님께서는 개성에 계신 부모님을 몹시 그리워하셨다. 시어머니는 이북에 계신 부모님이 100세가 되신 해 이미 돌아가셨을 것으로 생각하시고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하셨다. 돌아가신 날을 알 수 없으니 생신날을 제삿날로 잡았다.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어머니께서 바빠지셨다. 서울 큰집을 오가며 개성식 제사음식을 배우셨다. 서울 큰집에 큰할머니는 개성에서 차리던 음식과 제사 형식을 우리 어머니께 전수해 주셨다. 제사 날짜가 결정되고 나도 바빠졌다. 음식 만드는 모든 일에 큰며느리로서 어머님과 함께 해야 했다. 몇 날 며칠을 장 보고 일에서 재료 다듬고 준비하다 보면 자정까지 일을 했다. 드디어 제삿날 나는 그 제사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제사상이었다. 음식의 종류와 음식의 양,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보며 내가 이제까지 경험해서 알고 있던 제사에 대한 생각을 확 바꿔놓았다.  

         

나의 아버지는 종손이다. 친정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평생 보며 자랐다. 엄마가 낮에 음식을 준비하시면 밤 12시를 전후해서 제사상에 음식을 놓았다(제상에 음식을 놓는 것을 진설이라 했다). 제사상은 큰 교자상이다. 네모난 교자상이 있는 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제사를 지내는 큰집이어서 장만한 교자상을 엄마는 귀히 여기셨다. 제기의 재료는 나무였다. 나무를 깎아 만든 고배(高杯:음식을 괴어 담을 수 있는 굽이 있는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제사음식은 두부지짐, 갈랍이라고 하는 동그랑땡, 동태 전, 조기찜, 삼색나물, 소고기 돼지고기 적, 소고기를 많이 넣어 끓인 뭇국을 탕으로 올렸다. 음식이 준비되면 다음부터는 남자들의 일이다. 아버지는 제사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구슬프게 축문을 읽으셨다. 이것이 내가 이제까지 보아온 제사였다.     


시댁은 제사상부터 달랐다. 어머님은 사당에서나 볼 수 있는 키 높은 상을 준비하시고 제기는 안성유기를 준비하셨다. 상과 제기의 위상만으로도 대단해 보였다. 유기는 매우 무거웠다. 보관하는 궤짝의 무게까지 합하여 내가 들려면 움직이지도 않았다. 번쩍번쩍 유기그릇에 과일이며 떡 각종 과자 등을 높이 괴었다.


개성의 제사음식은 충청도 공주 산골의 제사음식과는 많이 달랐다. 홍해삼을 비롯해서 채나물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나물종류도 삼색나물이라 하여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나물이 일반적인데 개성식은 5가지 나물을 준비해야 했다. 명절에는 제사음식에 명절 음식을 더해 준비했다. 설에는 조랭이떡국, 개성편수가 더해졌고 추석에는 토란국을 끓였고 송편도 집에서 만들었다.      


원래 개성음식은 화려하고 손이 많이 간다. 친정에서 제사상에 올렸던 간단한 조기찜도 시댁에서는 5가지 고명을 더했다. 시어머님께서 서울 큰집 할머니께 배워 오신 음식에 어머님의 솜씨가 더해져 더욱 화려하고 화려한 만큼 맛이 있었다. 명절이면 우리 5형제와 아이들, 작은집 식구들과 자손들 5촌 6촌까지 모였다.   

   

친정의 제사가 전통을 이어온 유교의 정신이었다면 시댁의 제사는 축제였다. 이북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지 살아 계신지 모르기 때문에 제사에서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다. 피난 오신 분들이 모여 고향음식을 먹으며 고향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당시 이산가족 찾기로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의 마음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개성관광 등 이북과의 교류가 활발할수록 친척들은 모이기를 원했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만큼 고향음식도 그리워했다.      


시어머님 시아버님은 물론 우리 윗대 일가친척은 대부분 돌아가셨다. 어머님께 꾸중 들으면 배웠던 개성음식을 만들 일도 거의 없고 음식을 만든다 해도 먹을 사람도 없다.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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