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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솜 Sep 09. 2024

우리는  One Team

맏며느리의 변명

지하철에서였다. 앞에 앉은 두 중년 부인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자신이 겪은 너무도 억울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한 사람은 듣고 있는 상황이었다. 앞에 서 있던 나도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용은 제사에 시댁에 가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경험이었다. 역시 결혼한 여자들의 영원한 주제는 시댁에 대한 불만이고 그 중심에는 제사라는 행사가 있다. 지금은 결혼하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사는 며느리가 많아 제사로 인한 시댁과의 갈등이 많이 줄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아직도 며느리의 불만은 여전한 것 같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러했다. 자신이 작은며느리인데 평소 손위 동서를 친언니만큼 따르고 큰며느리와의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어느 날 '오늘 제사인데 왜 오지 않느냐'는 손위 동서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자기는 제삿날이 다음날인 줄 알고 다음 날 결근계까지 내고 야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고 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급히 큰집에 갔는데 많은 사람 앞에서 손위 동서가 자신을 혼냈다고 한다. 그 이후 형님과는 행사 때나 겨우 만나고 만나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제사가 가족의 의를 끊어 놓은 것은 아닌지 안타까웠다.      




동서가 사과 상자를 보냈다. 택배를 받고 전화를 걸었다. 추석 과일을 벌써 보낸 거냐고 물었다. 동서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올해 햇사과 수확했다는 연락이 와서 과일을 주문하면서 형님에게도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동생의 허리 수술로 이번 추석 차례에는 참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받고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과 의논했다.      


“이번 추석에는 막내 동서네만 참석하겠네. 

추석이 얼마나 남았지요? 김치를 미리 담가야 하는데....  

여름 배추는 잘 담가도 맛이 안나. 제사상에 놓을 것만 조금 살까 봐.”  

   

“간단하게 준비해요. 

몇 년 동안 산소에 가지 못했는데 올해는 산소에 가서 차례를 지낼까?”


“막내 동서네 새 며느리 봤는데 차례 지내는데 같이 오려고 하지 않겠어요?”

“전화해 보고 결정합시다. 다른 사람들 사정은 어떤지. ”     


시부모님과 시부모님의 형제분들도 모두 돌아가셨다. 이제 우리가 제일 어른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 같았던 맏며느리의 무거운 부담을 한시름 내려놓았다. 제사를 어떤 형식으로 지내든 제사상에 어떤 음식을 놓든 형제들과 의논 해서 정하면 된다. 이렇게 부담 없이 추석을 보내리라고 과거에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요즘은 우리 3형제 부부만이 조촐하게 차례를 지내고 어쩌다 장손이 참석한다. 제사 음식의 격식을 지키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으니 많은 음식을 준비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일이 줄어 좋기만 하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정답게 옛 이야기 하며 담소하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다. 오물조물 손이 많이 가던 자식들도 다 커서 출가하고 출가하지 않은 아이들도 명절날 큰집에 오려하지 않는다.  






명절이면 시아버님은 물론 시아버님의 사촌 형제네 집안까지 참석하셨다. 안방 건넌방 마루 할 것 없이 사람으로 가득했다. 며느리들은 부엌에서 음식 준비에 바빴다. 작은 아버님들은 안방에서 피난 오시기 전 이야기부터 현재 먹고사는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까지,  작은 어머님들은 건넌방에서 당신들이 시집살이하셨던 이야기를 마치 어제일 같이 실감 나게 하셨다. 작은집 시어머님들은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도 부엌에서 일하는 며느리들에게 신경을 쓰셨다. 부엌에 나오셔서 고생한다 수고한다 예쁘다를 번갈아 가며 말씀하셨다. 명절날 만남은 두고 온 고향의 그리움에 대한 회포를 푸는 시간이었다. 친척분들은 명절을 핑계로 만남 자체를 즐기셨다. 친척분들은 명절을 핑계로 만남 자체를 즐기셨다. 


시아버님 시어머님이 집안의 중심이었지만 제사의 실세는 시어머님이셨다. 어떤 음식을 차릴 것인지 음식의 양은 얼마큼 장만할 것인지 시어머님이 주관하셨다. 시어머님의 지시에 따라 실제로 일을 하는 사람은 세명의 며느리였다.  그중 나는 맏며느리다. 명절 몇 주 전부터 음식을 준비했다. 개성식 제사상은 화려하고 풍성했다. 김치만도 몇 가지가 놓였다. 설에는 김장김치를 놓지만 추석에는 배추김치를 새로 담갔다. 나박김치는 명절 하루나 이틀 전에 담았다. 김치를 담글 때마다 어머님은 김장김치는 고수를 넣어야 하고 나박김치는 벼락김치가 맛있다는 등 음식의 노하우를 말씀하셨다. 시어머님 말씀은 곧 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일은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제사음식이라 복잡했고 개성음식이라 특별했다. 음식 하나하나 정성이 들어갔다. 장을 보는 일에서부터 완성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다. 어떤 음식재료는 어디에서 사는 것이 좋은지 언제 다듬고 언제 절여야 하는지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장식을 하여야 하는지까지 그때그때 할 일이 항상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럴 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동서들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동서들과 나는 One Team이었다. 나는 항상 동서들이 고마웠다. 차도 없고 물건을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함께 장을 봐주면 그것이 고마웠고 직장에 다니는 동서가 때문에 늦게 오면 늦게라도 나타나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내가 도움을 청할 때 동서들의 생각이 어땠었는지는 내가 알 수는 없다. '시어머니도 아닌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같은 며느리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동서들은 '같은 며느리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라고 생각했을 거라 추측한다. 왜냐하면 동서들은 이제까지 내 말에 토를 달거나 거절하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집단도 하나의 조직이다. 형제간의 미묘한 책임문제 감정문제는 수시로 일어날 수 있다. 어느 조직이라도 엇나가는 조직과 화합하는 조직은 있다. 서로가 배려하며 커다란 원칙을 지켜야 조직은 유지된다. 


30년 넘게 제사 지내면서 돌아가신 조상님들이 만들어 놓은 음식을 드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제사라는 형식은 조상을 위한 제도라고 하지만 결국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제도다. 조상을 중심으로 일가의 화합을 위한 중한 행사다. 나는 제사를 준비하면서 항상 제사의 본질을 생각해 보았다. 원래 형제자매는 자라면서 수 없이 싸우면서 큰다. 형의 입장에서는 끝없이 양보하는 거 같고 동생의 입장에서는 형이 모든 것을 다 가진 거 같다.  맏며느리의 입장에서는 장남의 책임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온다. 각자 잘 살다가 제사라는 형식에서 그 문제는 표출된다. 이러한 고차방정식을 푸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그 방정식을 풀고자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이 모이는 것이 좋았고 동서들이 도와주면 고마웠다. 제사 때문에 형제간의 의가 상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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