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축문(祝文)
제사는 돌아가신 분의 기일에 지내는 기제사, 명절에 지내는 차례, 추석이나 한식에 조상의 산소에서 가서 산소를 돌보고 절을 하는 성묘, 일 년에 한 번 모든 조상에게 지내는 시제가 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기제사다. 명절에 지내는 차례는 아침에 지내고 절차가 좀 더 간소하고 명절이기 때문에 분위기도 즐겁다. 시제는 일 년에 한 번 먼 일가친척까지 만나기 때문에 소풍 나온 기분이다. 성묘 또한 산소에 가서 간단하게 차리고 절을 하는 것으로 예의를 갖춘다. 하지만 기제사는 고인이 돌아가시고 그분을 잊지 않기 위해 지내는 날이기 때문에 돌아가신 분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그런지 분위기가 무거웠다.
혼을 부르는 의식은 해가 저물어야 한다. 제사는 보통 밤 12시 가까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음식 준비로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의 인사로 분주하던 분위기는 제사가 시작되면 조용해졌다. 모두들 제사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제사가 시작된다. 주변은 컴컴한데 제사상 양옆 촛불이 분위기를 한층 엄숙하게 만들었다.
“유~~ 세차 ~~~ 효자 봉규 ~~~”
아버지는 제사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구슬프게 축문을 읽으셨다.
아버지는 장손이셨다. 대대로 내려온 큰 아들은 아니다. 족보를 보면 할아버지 대에서 양자를 가셔서 장손이 되셨다. 엄마는 장손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셨다. 엄마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을 쥐어준 가난한 가문의 장손 며느리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모든 조상에 대한 의무도 그 의무를 지키기 위해 만든 법칙 도 모두 아버지와 엄마의 몫이었다. 자식인 내가 보기에 엄마 아버지는 내 새끼 키우는 것보다 일가친척을 챙기고 집안이 기강을 세우기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집안 일가친척 누구도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제삿날이면 엄마는 하루 종일 바빴다. 제사 음식 준비는 물론 제사 지내러 온 일가친척의 끼니까지 챙겨야 했다. 친척들은 오는 사람마다 시간이 달라 제삿날 저녁은 횟수가 정해지지 않았다. 제사음식 장만하랴 상 차리랴 제삿날 저녁은 분주했다. 엄마는 제사음식 준비보다 사람들 접대를 힘들어하셨다. 자정에 시작한 제사가 끝나는 시간은 한 밤중이었을 터인데 사람들은 빙 둘러앉아 제사 음식을 먹었다. 화려한 야식 파티였다. 고기와 무를 넣고 끓인 탕은 밤에 먹어도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이다. 제사는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되는 큰 행사였다.
나는 자라면서 엄마의 수고가 제일 마음에 걸렸다. 엄마는 고모나 작은엄마가 일찍 와서 돕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엄마가 재료를 준비해 놓으시면 나는 전을 부쳤다. 직장을 다닐 때는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일찍 퇴근하기도 했다. 시대의 흐름은 역행할 수 없는지 제사는 점점 간소해졌다. 고모 작은집의 참석이 뜸해졌다. 참석하더라도 교회를 다닌다는 핑계로 절을 하지 않고 먼발치에서 보고만 있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제삿날 신이 난 사람은 아이들이었다. 제사 다음 날 우리는 동네에서 인기가 많았다. 제사상에 놓았던 곶감 약과 산자 등을 들고나가 아이들과 나누어 먹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제사 음식은 좋은 군것질 거리였다.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 우리도 진오네처럼 제사 지내자고 졸랐다고 한다.
점점 자라면서 제사는 나에게 더 이상 흥미로운 일은 아니었다. 매번 음식의 종류가 같았다. 엄마가 일이 많아 힘드신 모습을 보는 것은 딸로서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제사는 철저하게 남자 중심이다. 자정까지 졸음을 참을 수가 없어 한쪽 구석에 잠이 들었다가 제사가 끝나면 물 한 모금 마시거나(옛 어른들은 제사에 올렸던 물을 마시면 무서움이 없어진다고 하셨다) 곶감 하나 집어 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오빠는 끝까지 제사의 주인공이었다. 오빠는 제사가 끝나고 음복할 때까지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기제사는 5대 봉사라 하여 나를 중심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까지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조상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아들이 아닌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딸이어서 자유로웠다. 동네에서 굿을 하면 궁금해서 기웃거렸다. 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무당이 작두를 타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재미있는 퍼포먼스로 느껴졌다. 엄마는 미신이라고 그 근처도 가지 못하게 혼을 내셨다. 친구를 따라 교회에도 갔다. 친구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했다. 밤새 모두 하나님 나라에 있는데 혼자 떠도는 꿈을 꾸었다. 나는 어린 시절 혼재된 종교관 속에 살았다. 유교가 종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변화하지 않으면 정체된 물과 같다. 나의 아버지는 유교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셨고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고 어떤 사람들은 서구 학문을 신봉하였다. 아버지는 변화를 꿈꾸셨다. 우리 집에 변화가 생겼다. 정부에서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관혼상제의 허례허식이 심해서 사회문제로 여기던 정부는 이를 없애기 위해 의식절차를 간소화하라는 지침을 만들었다. 고등하고 윤리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이를 적극 수용하셨다. 제사의 횟수와 절차를 대폭 줄이셨다.
시대와 사회와 집안에는 나름의 문화가 있다. 형식은 종교나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제사는 유교문화의 대표적인 형식이다. 우리 집은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문화가 자리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가 많이 사라졌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셨다.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학문으로 '인' 사람의 본질에 대한 학문이었다.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하는 데 힘쓰기를 강조하였다. 아버지는 조상을 받드는 것이 아버지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조상의 뜻을 받들고 자식들을 키우며 겸손하게 사는 것이 삶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방법이었다. 그 중심에 제사라는 형식이 있었다.
내가 결혼하고 시댁은 또 다른 문화가 있었다.
삶이 재미가 있는 것은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