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같은 명절
"집집마다 오이 먹는 방법도 다르다.
똑바로 먹는 집도 있지만 꼭지부터 먹는 집도 있다.
결혼하면 너도 우리가 먹는 방법대로 해라”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어머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40년 전, 며느리가 내 주장을 할 수 없도록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어머니는 미리 정의를 내리셨다. 한 동네 살면서 태어날 때부터 보아온 남편과 시부모님은 결혼이 결정되면서 달나라에서 온 사람들보다 낯설었다. 내가 두 집안 간에 가장 다르게 느낀 것은 제사의 정신과 형식이었다.
시아버지는 개성에서 피난 오셔 종로구 옥인동이 고향인 시어머님과 결혼하셨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다. 조선 시대 이전까지 정치의 중심지였고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워 선진 문물이 들어왔으며 지금의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해외무역이 활발하였다. 인삼과 같은 특수 작물의 재배가 활발하고 상업이 발달하여 개성상인과 같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근대적 상공업이 발달한 곳이다. 개성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따라서 한양의 문화를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와 풍습을 지키려는 성향이 강하다.
종로구 옥인동은 경복궁 서쪽 인왕산 아래 위치한다. 조선시대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지금의 서촌지역은 요즘으로 말하면 강남을 버금가는 핫플레이스였다.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다. 경복궁의 동쪽 지금 북촌이라 하는 곳은 사대부가의 주거지였다. 서촌이라 하는 인왕산 아래는 벼슬에 입문한 신흥 사대부의 주거지 혹은 별서, 궁궐에 기대 살아가는 내시나 관료, 겸재 정선과 같은 예술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서촌을 찾는 이상으로 인왕산 아래는 근현대 문화의 중심지였다.
아버님은 개성에서 큰 삼밭을 하셨다고 한다. 어머님도 옥인동에서 큰 기와집에 사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비교적 풍족하게 보내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님께서는 매사에 진취적이고 부지런하셨으며 어머님께서는 의식주에 안목이 있으셨다. 어머님은 때와 장소에 따라 옷 입는 것에 신경을 쓰셨다. 어머님이 입으신 옷은 옷감의 품질과 유행하는 디자인이 어디에서나 돋보였다. 음식에도 일가견이 있으셨다. 때에 따라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어느 시절에는 어떤 음식 재료를 갈무리해 놓아야 하는지 음식을 놓는 그릇에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셨다.
나는 산골에서 땅 한 뙈기 없는 유학자의 자부심만으로 살아오신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제들의 부모 역할을 하셨다. 도시에 나오셔서 선생님이 되셔서 시골에 있는 일가친척이 한 명이라도 신식공부를 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셨다. 집에는 항상 삼촌과 고모들 촌수를 알 수 없는 시골 친척들로 붐볐다. 엄마는 많은 식구들 삼시세끼 차리는 것도 버거워하셨다.
전쟁은 사람들의 삶을 흩어 놓았다. 북쪽에 살던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 와서 삶의 자리를 마련했다. 새마을 운동이며 경제개발이며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였다. 시골이며 산골에 살던 사람들은 도시로 나왔다. 도시는 발전하고 거대해졌으며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았다. 우리 마을에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대문을 나가면 골목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놀았다.
남편과 나는 어린 시절 갑순이와 갑돌이처럼 한마을에 살았다. 자라서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했을 때 시댁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셨다. 이북에서 피난 오셔서 고향에 남아계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생사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결혼 전까지 이산가족의 아픔을 생각하지 못했다. 친정아버지 고향이 공주였기 때문에 기차와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면서도 수시로 다니셨다. 공주의 일가친척이 도시에 올라오면 우리 집에 묵었다. 멀어도 힘들어도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 고향이라 생각했다.
시댁에서 고향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서울과 개성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시아버님은 젊은 시절 자전거를 타고 오가셨다고 한다. 연세가 드시고 삶이 안정될수록 고향을 그리워하셨다. 명절이면 시아버님의 사촌과 그 자손들까지 우리 집으로 오셨다. 우리는 명절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대부분 고향에서 드시던 음식이었다. 시어머니는 이북에 계신 부모님이 100세가 되신 해 이미 돌아가셨을 것으로 생각하시고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하셨다. 돌아가신 날을 알 수 없으니 생신날을 제삿날로 잡았다.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어머니께서 바빠지셨다. 서울 큰집을 오가며 개성식 제사음식을 배우셨다. 서울 큰집에 큰할머니는 개성에서 차리던 음식과 제사 형식을 우리 어머니께 전수해 주셨다. 제사 날짜가 결정되고 나도 바빠졌다. 음식 만드는 모든 일에 큰며느리로서 어머님과 함께 해야 했다. 몇 날 며칠을 장 보고 재료 다듬고 준비하다 보면 자정까지 일을 했다. 드디어 제삿날 나는 그 제사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제사상이었다. 음식의 종류와 음식의 양,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보며 내가 이제까지 경험해서 알고 있던 제사에 대한 생각을 확 바꿔놓았다.
나의 아버지는 종손이다. 친정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평생 보며 자랐다. 엄마가 낮에 음식을 준비하시면 밤 12시를 전후해서 제사상에 음식을 놓았다(제상에 음식을 놓는 것을 진설이라 했다). 제사상은 큰 교자상이다. 네모난 교자상이 있는 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제사를 지내는 큰집이어서 장만한 교자상을 엄마는 귀히 여기셨다. 제기의 재료는 나무였다. 나무를 깎아 만든 고배(高杯:음식을 괴어 담을 수 있는 굽이 있는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제사음식은 두부지짐, 갈랍이라고 하는 동그랑땡, 동태 전, 조기찜, 삼색나물, 소고기 돼지고기 적, 소고기를 많이 넣어 끓인 뭇국을 탕으로 올렸다. 음식이 준비되면 다음부터는 남자들의 일이다. 아버지는 제사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구슬프게 축문을 읽으셨다. 이것이 내가 이제까지 보아온 제사였다.
시댁은 제사상부터 달랐다. 어머님은 사당에서나 볼 수 있는 키 높은 상을 준비하시고 제기는 안성유기를 준비하셨다. 유기는 매우 무거웠다. 보관하는 궤짝의 무게까지 합하여 내가 들려면 움직이지도 않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유기그릇에 과일이며 떡 각종 과자 등을 높이 괴었다. 제사음식도 충청도 공주 산골의 제사음식과는 많이 달랐다. 홍해삼을 비롯해서 채나물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나물종류도 삼색나물이라 하여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나물이 일반적인데 개성식은 5가지 나물을 준비해야 했다. 음식의 재료와 만드는 과정이 훨씬 힘들었다. 명절의 차례상은 기존에 먹던 음식에 제사음식이 더해졌다. 설에는 조리떡국, 개성편수를 빚었고 추석에는 송편을 만들고 토란국을 끓였다.
원래 개성음식은 화려하고 손이 많이 간다. 같은 조기찜이라 하더라도 친정에서는 간단히 조기를 쪘다면 시댁에서는 그 위에 5가지 고명을 올렸다. 서울 큰집 할머니께 배워 오신 음식에 어머님의 솜씨가 더해져 더욱 화려하고 화려한 만큼 맛도 있었다. 명절이면 우리 5형제와 아이들, 작은집 식구들과 자손들 5촌 6촌까지 모여 잔칫집 같았다.
친정의 제사가 전통을 이어온 유교의 정신이었다면 시댁의 제사는 축제였다. 이북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지 살아 계신지 모르기 때문에 제사에서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다. 피난 오신 분들이 모여 고향음식을 먹으며 고향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당시 이산가족 찾기로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의 마음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개성관광 등 이북과의 교류가 활발할수록 친척들은 모이기를 원했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만큼 고향음식도 그리워했다.